[논평] 법원은 현대판 노예제를 지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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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등록일
2004-09-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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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법원은 현대판 노예제를 지지하는가

엘지전자를 퇴사해 경쟁사인 팬텍&큐리텔에 새 일자리를 마련한 연구원에 대해 최근 법원은 1인당 하루 3백만원의 배상금을 부과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앞서 이미 우리나라 법원은 엘지전자의 전직 금지 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회사를 다니지 말도록 선고한 바 있다. 이 재판은 항소심이 진행중이나, 상급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도 기다리지 못한 엘지전자 측에서 재차 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다시 엘지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관련한 논평을 발표, 과학기술인에게 동종 업계 내 전직금지가 불합리하며 인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밝혀 왔다. 과학기술인은 홀로 연구할 수 없고, 고도로 세분화된 전공과 전문성 탓에 타업계로의 전직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동종 업계로의 전직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한 직장에 평생을 바치라는 뜻과 다름아닌데, 그렇다고 연구원의 직업안정성을 보장해주는 회사는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법원은 이전 판결에서, 전직시 1년간 취업을 금하도록 했는데, 이 공백기간동안의 전문성 상실과 그에 따른 고용가능성 저하는 둘째치고, 퇴직 연구원과 그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라는 것인지, 무책임하기 그지 없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지적재산권의 침해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전직 연구원들을 잠재적 기술유출 범죄자로 낙인 찍는 것은 인권 보호라는 기본적 법정신조차 지켜지지 못하고 거대 자본의 압박에 동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구원이 오랜 시간에 걸친 공부와, 노력과, 경험에 의해 습득한 개개인의 지적 자산은 소속회사의 소유가 결코 아니다. 그것이 직무에 의해 향상된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유독 연구원에 대해서만 경력개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판결 내용을 접한 많은 현장 과학기술인들은, 연구원들이 물어야 할 하루 300만원의 배상금 액수에 대해서도 경악과 경멸심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지적 가치가 쉬이 계량화 될 수 있겠냐마는, 머리 속에 넣어 나온 전 직장에서의 경험의 가치가 그만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정도라면, 과연 어째서 엘지전자는 그들의 재직중에 그만한 대우를 해 주지 않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이땅의 모든 과학기술인이 가진 공통의 문제로, 우리 과학기술인연합이 이번 전직 배상 판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9월 6일자 주요 신문에는 삼성전자의 마케팅 담당 고위 임원이 미국 인텔로 전직한다 하여 떠들썩하다. 연간 11조원 규모의 마케팅 비용을 주무르던 사람이 갖고 있는 노우하우, 기업 전략, 고객 정보, 외주 업체와의 연계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클 것인가? 연구원의 전직에는 현대판 노비 문서를 들이대며 길길이 날뛰는 거대 자본이 어찌하여 마케팅 전문가의 전직에는 관대한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사회가 과학기술인에 대해 어떠한 불합리한 차별을 자행하고 있는지 거대한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다.



연구원 전직에 대한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이전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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