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3) > 과학기술칼럼

본문 바로가기

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3)

페이지 정보

박상욱 작성일2005-04-08 00:35

본문

(전편에 이어서)

산업정책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쨰, 유치산업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국의 산업이 외국 산업에 비해 발전 초기단계에 있을 경우, 수입 규제와 관세 장벽, 보조금 지급과 정책 금융, 연구개발자금 지원 등 각종 수단을 통해 경쟁력을 가질 때까지 온실 속의 화초로 속성 성장시키는 정책을 편다. 물론, 이미 경쟁력을 가진 선진국들은 개도국들이 선호하는 이러한 모든 유치산업 보호책을 '무역장벽' 이라던가 '불공정행위'로 몰아붙인다. WTO의 회의마다 선진국과 개도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것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농업정책도 일종의 산업정책으로, 다른 분야보다도 자국 산업 보호의 색채가 가장 진한 분야이지만,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둘째,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략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성장동력을 설정하고 선정된 분야의 산업에 대해서는 유무형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퍼붓는 것이다. 차세대 성장동력의 선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이러한 의미의 산업정책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민간과 정부의 주도성이라는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는데, 종래의 개념에서 이러한 류의 산업정책은 정부 관료가 민간 기업에 비해 정보력과 판단력에서 현격한 우위를 갖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정부가 산업 발전을 이끌어 나간다는 엘리트주의가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우리나라의 일부부처 관료들은 여전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정책에 있어서나 기술정책에 있어서나 시장 실패(market failure)는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패러다임이다. 시장의 자율에 맡겨 놓는 경우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거나, 소극적으로 말해도 '개입하지 않는 것보다는 못하므로' 정부가 이끌어 주면서 앞길도 치워주고 뒤도 밀어주고, 심지어 조향도 해준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기술정책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산업에 있어서 시장실패는 제조 설비나 인프라 투자에서의 과소투자(under-investment)에 의한 시장실패를 의미하는데, 기술정책에 있어서의 시장실패는 주로 연구개발에 있어서의 과소투자를 의미한다. 연구개발에서의 과소투자 문제는 주로 원천기술을 먼저 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후속기술이나 응용기술의 개발에서 역전당해 기술 우위를 빼앗기고, 결과적으로 산업에서의 우위를 빼앗기는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미국은 트랜지스터, 메모리반도체, 비디오 레코더, 액정디스플레이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나 정작 그것을 발전시켜 돈을 번 나라는 일본이고, 반도체와 LCD의 경우 한국도 뒤를 따르고 있다. 미국 학자들은 이것을 산업화 단계보다도 더 이른 단계에서의 과소투자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듯 하며, 연구개발정책(R&D policy)이라는 분야를 발전시켰다. 연구개발정책은 기술정책의 주요한 줄기로, selection과 portfolio 를 다룬다. 최근에는 이 분야가 연구개발 기획과 경영으로 연결되면서 기술경영으로 이어졌다.

기술경영은 기술개발과 기술개발조직의 관리에 관한 경영학의 분야이기도 하고, 산업공학의 분야이기도 하며, 혁신체제론의 분야이기도 하다. 경영분야에 대해 길게 쓰는 것은 글의 논지를 흐트러뜨릴 수 있어서 짧게 넘어가는데, 경영학에서 출발하여 기업혁신, 나아가 산업혁신으로 논지를 확장해 온 미국 계열(M. Porter)와 혁신체제론에서 시작하여 기업레벨의 혁신전략에 관심을 갖는 영국 계열(K. Pavitt, J. Tidd, M. Teubal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혁신이론보다는 기술관리,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자원관리, 기술전략, 금융공학 등이 강세이다. 

기술정책의 다른 큰 줄기는 기술이전과 거래, 가치평가 등 기술의 확산과 관련된 경제학적 이슈, 기술표준과 규제에 대한 정책, 기술혁신형 벤처와 기술금융정책, 그리고 지적재산권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기술표준과 규제에 대한 정책은 주로 정보통신 분야에서 주파수 자원, 차세대 통신과 방송의 표준, 통신시장에서의 경쟁과 규제, 융합(convergence) 등의 핫이슈들 포함하기 때문에 90년대 이후 기술정책의 독보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이 영역은 여전히 정부의 파워가 막강하기때문에 학문의 힘이 정부의 결단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기술의 확산과 기술금융, 지적재산권,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연구개발투자의 성과와 생산성, 경제성장의 주제는 기술경제학의 영역과 오버랩된다. 따라서 기술경제학과 기술정책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내용을 알기 전에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 판단하게 되는 일반 대중의 경우 기술정책은 무언가 행정학이나 정책학의 내용을 기술에 적용한 것이고, 기술경제는 경제학의 한 분야로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기술정책은 기술경제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고 응용하는 분야로 보는 것이 옳다.

연구개발 투자의 효과에 대해 "따져보자"고 나서서 각종 성과지표를 만들고 R&D 투자가 부가가치 창출에 직접적으로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그래서 GDP와 생산성을 얼마나 증가시켰는지 분석하는 분야가 기술경제학의 큰 줄기를 차지한다. 기껏 연구개발해서 선진국에 갖다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외화를 벌었더니, "분석해보니 연구개발보다는 자본투입과 노동생산성 증가의 효과가 크더라"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저러한 경제지표들을 식에 대입해서 요리조리 굴린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효과에 대해 따질 것은 따지고, 투입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다면 과감히 중단할 수도 있는거고, 또 투입한 만큼 나오지 않으면 과학기술인들을 더 빡세게 다그쳐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곳이 여기다. 정성적 성과보다는 계량적 성과를 강조하여 특허 몇건 시제품 몇개 이런 식의 목표를 설정하는 곳도 여기다.(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사조가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혁신정책의 발전단계중에 '기술경제학의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가 있다. 연구현장에서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면 대략 언제부터 위와 같은 분석이 이루어지고 계량적 성과가 강조되었는지 기억하실 지도 모르겠다. 과기혁신정책의 발전단계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이 연재글의 (2)회와 (3)회에서 다른 내용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실패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특징으로 한다. 물론, 최근 산업정책에서 SIS(sectoral innovation system) 개념을 채택하거나, 기술경제학의 진보진영에서 진화주의적 경제학(또는 진화론적 경제학)과 혁신체제론을 발전시키고 있기에 혁신체제론을 기존의 흐름들과 명확히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다만 최근의 그러한 변화들을 이끌어 내었고 여러 학자들에 의해 (무리가 있는지 몰라도) 혁신정책의 세대 구분이라는 시간축 자르기가 통용되는 것으로 볼 때 혁신체제론을 종래의 산업정책이나 기술정책과 어느정도 분리된, 그러면서 종래의 분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일종의 신사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혁신정책의 발전과 혁신체제론의 개략이 시작됩니다.)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LIDE UP

모바일에서는 읽기만 가능합니다.
PC 버전 보기
© 2002 - 2015 scieng.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