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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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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작성일2018-03-0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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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거의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거리로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상화폐라고도 불리는 암호화폐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암호화폐에 대해 길게 거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관련 논쟁에서 자주 거론되어 온 문제 하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즉 암호화폐 옹호론자들, 특히 정부의 강경한 규제방안에 대해 신문칼럼 등을 통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온 이들이 가장 자주 썼던 용어가 바로 ‘쇄국정책’이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근대화에 성공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더욱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또 다시 스스로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라는 발상이 근저에 깔려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중들이 상당히 공감하고 우려할 수도 있는 이러한 인식에 대해, 세계사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춘 이들이라면 결코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쇄국을 했든 개국을 했든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제국주의 열강세력들의 침략 아래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리 대중들에게 깊숙이 뿌리박은 ‘쇄국정책 트라우마’는 우리나라도 과학기술을 더욱 빨리 진흥시켜 선진국을 따라잡고 더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발전한 듯하다.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이들까지도, 우리가 단숨에 선진국들을 앞지를 수 있는 무슨 지름길이라도 있는 양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난 1990년대 15대 국회에서는 이상한 과학진흥법안 하나가 발의돼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서양의 현대과학기술을 추월하기 어려우니 동양사상 등에 바탕을 둔 우리만의 독특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에,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귀가 솔깃해졌던 모양이다. 영구기관(永久機關) 등을 만들었다고 사람들을 속이는 사례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많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민족과학과 동양철학의 우수성을 통하여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속아서 망신을 당한 유력 정치인과 저명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10여년 전 황우석 사건 당시에, 논문조작이 밝혀진 이후에도 일반 대중 뿐 아니라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조차 맹목적인 추종과 온갖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인 이유 역시 쇄국정책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황우석 씨의 줄기세포 기술이 300조원의 가치가 있다는 ‘가짜뉴스’와 함께, 그가 우리나라를 단숨에 생명과학 선진국으로 도약시킬 것이라는 헛된 망상과 기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황우석 사건의 여파가 마무리되기도 전인 지난 2007년에는 한 시사월간지가 세계 물리학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노벨상을 받을만한 획기적 이론이라고 대서특필한 이른바 ‘제로 존 이론’ 파문이 있었다. 한국물리학회에서는 과학적 가치가 전혀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지도급 과학기술자들조차도 서양에서 발전해온 최신 입자물리학을 우리나라 재야 과학자가, 그것도 ‘동양사상적 기반과 직관에 의해 일거에 바꿀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미시의 양자역학 세계에서는 입자가 에너지준위를 뛰어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겠지만,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에서 그러한 퀀텀 점프(Quantum Jump)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일부 분야에서나마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첨단과학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쇄국정책 트라우마와 강박관념, 조급증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최 성우 (과학평론가)

댓글 4

크립토님의 댓글

크립토

안녕하세요?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댓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아래의 암호화페의 기술표준 딜레마 글에 댓글을 적을까? 를 오래 고민하다가 이번 글에서 같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은 암호화폐라는 용어로 많이 언급됩니다. 저는 암호라는 단어에 과연 얼마나 많은 분들이 집중하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국내 암호학자가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crypto-currency 라고 합니다. 그만큼 암호가 핵심역할을 하는 화폐라는 의미입니다.

블록체인에는 해시함수(SHA-256)와 전자서명(ECDSA p-256)이라는 암호가 주된 기술이고, 이를 잘 엮어주면 블록체인이 됩니다. 물론 다양한 통신, 장비, 구현기법 등이 모두 합쳐져야 하는 것이지만, 가장 밑바닥에는 암호기술이 있습니다.

암호분야는 우리나라가 최고의 기술이나 능력을 갖고 있는 분야가 절대 아닙니다. 국내에는 암호전문가가 20명도 안됩니다. 암호론이든 암호학이든 그냥 아시는 분들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암호화폐를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간다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을 찾아보면 넉넉하게 카운트 했을때 20명일 것입니다.

암호라이브러리 갖다 쓰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만, 암호자체가 원천기술이 될 수 있어야, 암호화폐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에서 우리가 살아남는다고 봅니다.

최근 정부에서 블록체인 관련한 연구과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암호연구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ㅠㅠ

사람들에게 수박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녹색과 검정색을 사용할 것입니다. 맞기는 맞습니다만, 수박의 본질을 빨간색아닐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수박은 녹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블록체인이든 암호화폐든 암호전문가 양성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크립토님의 댓글

크립토

검증필암호모듈이라는 제도가 우리나라뿐만아니라,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등 많은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암호알고리즘을 새롭게 개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전세계 수학자, 암호학자, 공학자들이 모여서 설계 및 분석하고, 충분히 안전성이 받아들여지면, 그 암호는 국제표준 단계로 갑니다.

표준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표준이 되지 못한 암호알고리즘이 더 좋고, 안전하고, 블록체인에 써야할까요?

저는 표준에 채택되지 못한 암호가 더 안전하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표준 암호알고리즘을 쓰는 것이 호환성과 안전성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블록체인은 원장이 공개되고, 그 원장의 진위여부를 모두가 상호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참여자들이 이러한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핵심 기술인 암호알고리즘 만큼은 표준 암호를 써야 하며, 해당 암호를 구현한 결과물이 적합한 것인가?를 시험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안전한지? 정확하게 구현한 것인지? 뒷구멍은 없는지?의 보장 없이 4차산업혁명의 핵심을 맡길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결국 더 안전한 암호기술을 연구하고, 표준화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동의와 인정을 받고, 그 구현결과물이 완벽하다는 보장을 받은 뒤, 우리 사회의 블록체인 서비스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다양한 서비스 환경, 다양한 통신 환경, 다양한 기기 환경, 다양한 암호기술을 모두 알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 우리 사회에 충분하게 있어야 할 것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국내에는 20명도 안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인 만큼,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정도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최성우님의 댓글

최성우 댓글의 댓글

의견 감사합니다.  내용은 제 아래 글 '암호화폐 기술표준의 딜레마'에 더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디에 댓글을 적으시든 상관 없습니다...^^ (위 글은 모 정출연 사보에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만...) 

제가 아래글에서 결론적으로 암시했던 것은, 개방형 블록체인의 암호화폐는 기술표준 문제 등의 모순과 딜레마로 인하여 국가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대중적 거래수단으로 정착될수 있을지 불투명한 반면에, (탈중앙화, 분권화라는 원래 암호화폐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폐쇄형 블록체인 기술이 도리어 국가 주도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전망이었습니다.
호환성과 안전성 등을 위해서 표준 암호알고리즘이 필요하다는 크립토님의 의견도 제 결론과 비슷한 맥락으로 본다면 무리가 없을지요?

크립토님의 댓글

크립토

사실 대부분의 표준이 그렇듯이, 암호알고리즘이 국제/국내 또는 유력기관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올림픽 금메달 따는 것 만큼 힘듭니다.

즉, 암호학적 설계(방패) vs. 분석(analysis, 창)을 십수년간 진행합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불과 몇개가, 다시 국내/국제 등의 표준 후보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각국의 정치적, 사회적 논쟁속에 표준으로 채택됩니다. 최소한의 안전성에 대한 담보와 의견합의 정도를 이끌어 냈기 때문에, 이정도 되는 암호가 흔하지 않습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에 널리 쓰이는 암호는 지금 당장은 그래도 가장 안전하다고 간주되고, 경량이면서도, 빠르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SHA-256, ECDSA(p-256) 등을 쓰고 있습니다.

다만 4차산업혁명의 시대가 최소 50년은 계속되어야 한다면, 지금의 SHA-256, ECDSA p-256이 50년이상 안전할까? 그녀석들이 50년이상 안전하다고 동의하는 암호학자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안전하다고 인식되지만, 50년, 100년을 지탱할 암호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암호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암호가 불필요해지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반겨야 할 일입니다. 다만, 그러한 새로운 연구는 누가할까요?

지금의 연구자들이나 젊은 신진연구자들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분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어찌 4차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단어를 쓸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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