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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계기가 된 모즐리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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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작성일2019-09-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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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방부가 이공계 병역특례제 즉 대체복무제도의 축소 또는 점진적 폐지 방침을 밝히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군 복무의 형평성 차원 및 병역자원의 감소라는 상황에서 이공계뿐 아니라 대체복무제 전반의 손질과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지만, 과학기술계에서는 인재 손실에 따른 과학기술 역량뿐 아니라 첨단기술시대의 국가경쟁력과 국방력 저하마저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공계 대체복무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상당수의 국가에서, 과학기술계 인재들에게 병역의무를 대신하여 연구기관 또는 산업체 등에 종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기원은 뜻밖에도 20세기 초반에 노벨상 수상이 유력시되던 젊은 물리학자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영국의 과학자 헨리 모즐리(Henry Moseley; 18873-1915)는 옥스퍼드대학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하고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의 지도 아래 X선에 관한 연구 등을 하였다. 모즐리의 스승인 러더퍼드는 방사선에 관한 연구로 190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원자핵의 존재를 발견하여 원자핵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모즐리는 라우에(Laue)의 X선 산란실험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원소의 특성 X선 스펙트럼을 연구한 결과, X선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의 일정한 관계, 즉 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모즐리의 법칙’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원자 구조론 및 원자핵물리학 등 관련 분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원소들의 규칙성을 밝힌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원소주기율표는 19세기에 이미 나왔지만, 과학자들은 20세기 초까지도 원소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즉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의 개념을 사용하여 주기율표를 작성하였지만, 특정 원소의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를 합한 것인 원자량만으로 원소의 성질을 완벽히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모즐리의 발견은 바로 원소의 화학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 즉 양성자의 개수로 표현되는 원자핵의 전하임을 실험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따라서 모즐리의 법칙을 기반으로 하면 원소들의 정확한 원자번호를 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소주기율표 상의 미발견 원소들을 확인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모즐리가 한창 중요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을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연구에 지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모즐리는 오스트리아에서 학회에 참석한 후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지원 입대하였는데, 1915년의 갈리폴리(Gallipoli) 상륙작전에도 참전하게 되었다.
 갈리폴리, 터키어로는 겔리볼루(Gelibolu)라 불리는 항구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바라보는 터키 영토 안에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갈리폴리의 제압이 필요하였다.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 등의 연합군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키를 통과하여 러시아와 연락을 취하려고 갈리폴리 반도 상륙을 감행한 전투이다.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던 이 전투는 결국 연합군의 패퇴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사망자를 낸 1차대전, 아니 인류 전쟁 사상 최악의 전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등 연합군의 사상자가 무려 25만명 이상, 터키군의 사상자 규모 역시 비슷하게 25만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소재로 한 전쟁영화도 ‘갈리폴리: 최악의 상륙작전(Gallipoli 1915)’ 등 여러 편이 있다. 

 이 전투의 실패로 당시 영국의 해군장관이었던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터키군을 잘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1881-1938)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라 나중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모즐리는 터키군 저격병의 총격을 받고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이미 많은 성과를 낸 전도유망한 물리학자의 죽음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과학계에도 커다란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모즐리가 만약 그 당시에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이후 노벨 물리학상의 수상은 거의 확실시되었는데, 그와 동일한 연구인 원소들의 X선 특성 스펙트럼 진동수 측정 공로로 시그반(Karl Manne Georg Siegbahn; 1886-1978)이 1924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즐리의 참전을 간곡히 만류했던 스승 러더퍼드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지만,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이후 영국 의회 등에 편지를 보내고 여러 활동을 하였다. 즉 아까운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지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나라에 더욱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호소하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결국 영국 의회와 정부가 러더퍼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다른 나라들에도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과학기술자 병역특례, 즉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기원이다.
 다소 거론하기 거북한 사례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젊은 과학기술 인재들을 최대한 보호하였고, 패망 직전까지도 이들을 전장에 내보기보다는 가급적 연구개발에 매진하도록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뿐 아니라 국방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오늘날,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와 관련하여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되기를 기대해본다. 

                                                                                    By 최성우


이미지1: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모즐리 ⓒ 위키미디어
이미지2: 갈리폴리 전투에서 대포로 공격하는 터키군 포병 ⓒ German Federal Archive

댓글 2

묵공님의 댓글

묵공

우리나라에 도입된 병역특례제도에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한 칼럼을 통해 우리나라 과학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시는 겁니다.

최성우님의 댓글

최성우 댓글의 댓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포함한 여러 SCIENG 운영진들은 일찌기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에 관한 정책 연구도 수행했고, 결국 복무 연한의 단축 등 제도의 개선에 나름 상당한 기여를 한 바 있습니다. 벌써 15년도 지난 일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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