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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과학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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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작성일2019-11-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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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 실적은 괄목할 만하다. 특히 2010년대 이후에는 물리, 화학, 생리의학 중의 한 분야 이상에서 거의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여, 이제는 일본인 출신으로 노벨과학상을 받은 이들이 20명을 넘기에 이르렀다.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이웃 일본에서 수상자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왜 못받나?’ 하는 볼멘소리가 나오곤 한다.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에 일본인이 포함된 올해 역시 과학기술계에 대한 국정감사 자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노력이 부족하니 아직껏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질타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역사와 전체 연구 역량에 있어서 우리와 일본을 단순하게 비교하기에는 아직 무리이다. 특히 일본이 서구의 근대과학을 수용해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다면, 그 뿌리와 연원이 만만치 않게 길고 깊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본 과학기술의 초석을 마련하는 데에 오래 전에 기여했을 일본 근대과학의 선구적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싶다.

 일본에서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의 에도시대(江戶時代) 초를 전후하여 이미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 등이 보급되었다. 이들은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의미에서 난학(らんがく; 蘭学)이라고 불렀고, 우리로 치면 실학(實學)에 비유할만한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정립되었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을 대하는 측면에서 실학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일찍이 많은 네덜란드 서적들이 번역되어 들어오고 네덜란드어-일본어 사전이 만들어지면서 특히 의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서양 학문이 급속히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 물리학의 바이블이라 할만한 뉴턴(Newton)의 프린키피아 번역본 등이 서양과 큰 시기적 격차 없이 도입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만유인력을 최초로 이해한 인물로서 최한기(崔漢綺; 1803-1875)를 꼽는다면, 일본은 그보다 무려 200년 가까이 앞선 셈이다. 기술에 있어서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의 증기기관차가 서유럽에서 실용화된 지 불과 20년 정도 후에 일본에서 증기기관차의 모형이 제작될 정도였다.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열성적으로 탐구했던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난학자로서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1728-1779)를 들 수 있다. 그는 유학과 문학뿐 아니라 본초학, 의학, 광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던 학자로서, 상당한 기인(奇人)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 다카마쓰 번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히라가 겐나이는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활발했던 나가사키를 비롯하여 오사카, 에도(오늘날의 도쿄) 등지에서 의학, 본초학 등의 여러 학문을 배웠다.
 네덜란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박물학의 연구 등에 열심이었던 그는 특히 에레키테르(エレキテル)라 불리는 마찰 정전기 기구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정확히 원리를 깨닫고서 만든 것인지는 의심스러우나, 그는 정전기 발생으로 생긴 스파크를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기도 하였다. 물론 그의 학문적 행보가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만년에는 실수로 죄를 짓고 투옥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나, 그는 괴짜인 듯하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

 일본의 근대 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의학자로는 오가타 고안(緒方洪庵; 1810-1863)이 꼽힌다. 그는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의학자이자 난학자, 교육자이기도 했는데, 역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일찍부터 난학을 공부하였고, 난학의라고 불렸던 서양 의술에도 눈이 떠져서 심취하게 되었다. 나가사키로 이주하여 네덜란드인 의사로부터 직접 서양의학을 배웠고, 이후 의사로서 명성을 날리며 오사카에서 사숙을 열어서 학생들에게 난학과 서양의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오사카 대학의 기원이 되었다.
 오가타 고안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연두 예방접종 및 콜레라 치료법의 보급 등을 들 수 있으며, 다수의 서양 의학서를 번역하고 스스로도 의학서적을 저술하여 출간하였다. 
 에도, 메이지 시대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는 봉건 시대의 타파와 서구 문명의 도입을 통하여 일본 근대화의 전형을 제시한 인물이다. 저술가, 언론인이자 게이오대학을 창립한 교육자 등으로 두루 활동한 그는 현행 1만엔 권 일본 지폐의 모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보급과 계몽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저술하여 출판한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도해 물리 입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일본 최초의 과학 입문서로서 일본 초등학교(소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였다. 미국에서 유학한 일본 최초의 물리학 박사로서 도쿄대 총장을 지냈던 야마카와 겐지로(山川健次郞; 1854-1931)를 비롯해서, 훗날 일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쟁쟁한 일본의 물리학자, 자연과학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By 최성우

이미지1: 물리학과 자연과학의 계몽, 보급에도 앞장섰던, 현행 일본 1만엔 지폐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 
이미지2: 일본에서 1853년에 제작된 증기기관차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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