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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다시 읽는 '과학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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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 작성일2008-04-1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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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과학도서'를 많이 읽었다. 거의 편식하다시피 문학보다 과학을 가까이하며 지냈던 듯 하다. 교내 과학 독후감 대회 같은 것이 있을 때마다 상을 타기 위해 바둥거렸다. 대략 중고등학교 때까지 과학도서들을 열심히 읽은 이유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절반쯤은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고, 절반쯤은 "나는 과학자가 될꺼니까" 과학도서를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자기과시때문이었던 듯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학도서들을 맹렬히 읽으면서 내가 얻었던 것은 주로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뒤엔 과학도서를 멀리했다. 이제 반쯤 과학자가 되었으니 과학도서를 읽기보다는 공부를 하는게 더 맞았고, 화학과의 빡센 커리큘럼은 지적 호기심을 넘어 공부에 대한 공포감을 주었으며, 그지같은 학점으로 복수해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의식화'의 전통과, 대학생은 사회를 알아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은 과학도서를 더 멀리하게 만들었다. 대학원에서 연구개발활동에 몸담으면서부터는 과학도서보다는 과학잡지나 해외 최신기술 기사를 더 필요로 했다. 진득하게 '과학도서'를 읽는 일은 한가로운 풍류거나 '청소년에게나 해당되는' 일로 여겼다.

학위를 마치고, 이래저래 어째저째 살다보니 과학기술활동 속에 들어 있기보다는 어딘가 경계에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이쪽저쪽 다 살피고 서로 소통케 하는 일을 하려다 보니, 이제 다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전공을 벗어나서 '과학기술' 전반을 살피고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몇년 전부터는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과학기술에 대해 쓴 책들을 이것저것 읽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은 지금의 전공 공부에 포함되는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저 취미이다. 기술변화와 혁신에 관해 연구하는 경제학자,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기술사학자,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 등등 소위 과학기술을 객체적으로 보는 사람들-일부는 이공계 출신이기도 하지만-의 글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글들이 과학기술에 관한 근원적 이해가 부족해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떤 면에서는 과학기술인들이 보지 못하는 면, 보지 않는 면을 그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인들은 그들을 우습게 여겨선 안되며, 오히려 고마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몇달 전부터는 '과학도서'들을 다시 읽고 있다. 마치 무슨 스테이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종의 기원',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 등등... 꼭 과학 뿐 아니라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위하여' 등 건축서, '스컹크웍스'나 '콩코드' 같은 비행기 개발 뒷얘기까지 다양하다. 멀게는 중고등학교때부터 책장에서 먼지 맞고 있던 책들을 다시 꺼내 후루룩 읽는 것이다.

이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사실 그 놀라움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 과학도서들을 읽으며 지식을 얻고 있지 않다. 물론, 알고 있는 얘기이거나, 읽은 책이거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의 내용에서 별반 새로운 지식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시각 자체가 변한 것을 느낀다. 내용보다는 '바둑돌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읽으려 한다. 책이 세상에 던진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무슨 말을 하고 싶었기에 굳이 수고스럽게' 책을 썼고 이것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한다. 또, 글을 쓰고 있었을 당시의 저자의 위치, 난이도를 조절하는 테크닉 등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저자의 창발성이 가미된 내용이나 표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여러 과학 분야의 다른 학설들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주고 받아 공동진화의 노선 상에 있었는지, 심지어 당시의 사회와 시대상과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 받은 것인지 생각한다. 확실히 '성공한' 과학도서는 저자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바둑돌 한 수'가 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지식을 위해 책을 읽던' 청소년이게는 보이지 않던, 나에겐 나름대로 새로운 발견이다.

한가지 더. 정말 훌륭한 저자의 정말 훌륭한 과학도서에는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완벽히 녹아 들어가 있다. 그들은 때로 직설적으로, 때로 우회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그다지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의 언어'로 쓰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진의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간의 시간이 걸리는 듯 하다.(때론 영원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진화론(및 그것의 자연선택론, 적자생존론)이 시사하는 바는 아직도 사회과학자들에게 완벽히 이해되지 않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생물학 뿐 아니라 엔트로피와 확률, 나아가 화학까지 필요한데, 그것들을 튼실히 이해하는 '비과학기술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양자역학이나 QED 이론이 시사하는 바 역시 사회과학에서 응용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또는 영원히 응용되지 않을 지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QED가 사회현상의 설명에 응용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느냐?"고 물을라 치면, 그냥 나를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괴짜라고 치고 그냥 넘어가자. 분명한 것은 지난 150여년간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파생된 사고체계와 이론이 철학과 사회과학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며, 그 역에 비해 더 크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양쪽' 카드를 한장씩 까 보고 나니, 약간의 무력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고민도 된다. 나는 '이쪽'의 입장에서 '저쪽'을 대하는 언어를 써야 하나, 아니면 '저쪽'의 입장에서 '이쪽'도 좀 안다는 식의 언어를 써야 하나? 전자에서 시작해서 후자가 되었다가 다시 중간으로 돌아온, 그런 느낌이다. 

댓글 3

김근형님의 댓글

김근형

  잘읽었습니다.

한반도님의 댓글

한반도

  해마다 사계절이 순환되면, 마치 올해의 봄을 맞이하면서 작년의 봄을 회상하면서 무언가 반복된다는 윤회의 감상에 젖기쉬운데...  그래도 여전히 작년봄의 내 자신과 올봄의 내 자신이 엄연히 다르듯이 //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가면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왠지 나선형의 구조를 따라 터벅터벅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별다른 지식이 없을적에 그저 흥미롭게 읽어볼 요량으로 집어들었던 책에 대한 감상은 십수년이 지난후에 다시 교양서적으로 여기면서 읽었을때와는 분명 같으면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근데 박상욱님은 그러한 점을 꼼꼼하게 잘 쓰신 것 같네요.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박상욱님은 글은 좀 리처드 도킨스와 비슷한 필법이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심심님의 댓글

심심

  저도 많이 느끼는 바이지만..과학자나 엔지니어계통 분들의 무지함도 만만치 않더군요....

경상계 계열사람들이 과학쪽을 보는 눈보다 훨씬더 왜곡된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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