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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 - 끝없는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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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ritia 작성일2009-01-0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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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Popper 자서전 - 끝없는 탐구


포퍼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명이다. 철학계와 사회과학계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대중적인 인기는 그다지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포퍼 = 보수우익 사상가 쯤으로 치부되어 온 듯 하다.


포퍼의 저작 중 국내에 소개되어 많이 읽힌 것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 그리고 '역사주의의 빈곤' 이다. 이외의 책들은 에세이나 강연 모음집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 어렵고, 특히 80년대 이후 여든 줄에 접어든 노철학자의 '말빨 떨어진' 글들에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포퍼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하며, 무명의 수학 교사였던 포퍼를 주목받는 철학자로 변신시킨 것은 그의 나이 서른 둘(1934년)에 출판된 '탐구의 논리'이다.


'탐구의 논리'는 과학에 대한 글이다. 즉, 오늘날 '과학철학'이라 부르는 분야로 볼 수 있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고,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나누는 구획에 대해 연구했다. (여기서 사이비과학이란 근래 우리가 말하는 영구기관류의 것들이 아니고, 포퍼에 따르면 진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으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 사회과학을 칭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60년대 이후 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베이컨 이래 자연과학을 지탱해 온 '귀납법'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한 그는 철저한 실재론자였고, 언어철학 진영과 신경전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자서전에 따르면 그 갈등설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왜 갑자기 포퍼인가? 당신은 왜 갑자기 포퍼를 읽고 책 소개를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게 좋겠다. 지난 몇 년간 '쿤 이후'의 과학철학과 과학기술사회학 분야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부해 보았다. 그 결과 '쿤 이후' 학자들에 의해 '쿤 이전'의 논의들이 구닥다리로 치부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과학을 객체로 하는 학문 분야에서의 패러다임 쉬프트라 불릴 만 하다. (이와 관계된 여러 조류들에 대한 소개는 생략한다) 과학의 '지위'는 깎아내려졌고 인문학, 과학학자들은 '무식한 과학기술인들을 계몽해야 한다. 과학의 지저분한 속살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인들이 이러한 도전에 무관심한 가운데, 이러한 조류는 일반대중과 정책입안자들 속으로 퍼져갔다. 과학적 지식의 상대성과 사회성을 강조하는 쿤 이후의 조류와 비교하기 위해 '쿤 이전'을 들춰보는 작업으로 일단 포퍼와 머튼(차후에 올리겠음)을 재평가해 보기로 한 것이다.(그 다음으로는 최근의 극복 노력 - 이언 해킹, 미셸 깔롱, 피터 개리슨 등을 다루겠다)


포퍼는 오스트리아에서 수학을 전공한 과학자이며 (철학 박사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물리학계의 대가들과 교류했다. 자서전에는 당대의 수많은 물리학자들과의 만남과 토론이 언급되지만 그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들은 아인슈타인, 보어, 그리고 슈뢰딩거이다. 포퍼 스스로가 양자역학이 발전하는 데에 참여했고, 많은 과학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했다. 즉,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포퍼는 192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까지 이어진 물리학계의 논쟁의 중심에 끼어들어 과학적 지식의 발전과정과 과학자들의 태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포퍼의 시각에서는 뉴튼 역학이 양자역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전혀 혁명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쿤의 패러다임론이 발표된 뒤 포퍼와 쿤은 논쟁을 벌이게 된다)


포퍼는 '탐구의 논리'에서 과학의 특징은 '반증가능성'이라고 보았다. 어떠한 지식이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 반증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과학이냐, 아니냐의 구획 기준이라고 본 것이다. 자연과학 지식은 반증가능하다. 또한 과학자들은 반증가능성을 받아들인다. 포퍼는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서 그가 상대성 이론이 틀렸다는 실험 또는 관측 결과가 나온다면 즉시 기꺼이 버릴 수 있다고 말한 것에 크게 감명받는다. 반면 사회과학은 반증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포퍼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보수우익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반증가능성이 결여된 사이비과학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계급갈등이 증폭되고 자본주의의 파멸로 이를 것으로 예측한 것을 예로 들면, 20세기초 유럽에서 그 예측은 단지 '미래 전망'에 지나지 않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며, 그러한 주장을 설파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반증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믿는다'. 포퍼는 철학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것을 '믿고' 운동하는 것은 강하게 비판했다.(이러한 맥락과 이유를 간과한 채,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이유로 보수우익 사상가로 낙인찍혀 국내 진보진영으로부터 저평가된 것이다. 국내에 존재하는 사회구성주의 커뮤니티는 진보적 시민운동계열과 연결되어 있다)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연상시킨다. (포퍼의 '반증가능성' 도 쿤 이후 몇몇 학자들에 의해 비판된다. 예를 들면 다른 과학자가 다른 기기와 방법론을 통해 증명 또는 반증하는 과정이 사회적인 행위라던가, 기기들도 중요한 행위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과학적 지식의 반증가능성, 그리고 과학자들의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의 제한적 효용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자연과학의 중요한 특징이며, 사회과학이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성질(=과학성)'이다. 이 긴 '책소개'를 마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과학성이 덜한 '과학'(=사회학)으로 과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합당한가? 더 나아가 각종 사회과학적 기준을 이용해 결정된 '의사'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조향'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그 '각종 사회과학적 기준'에 변화와 보완이 필요하며, 과학기술인의 이해, 참여, 그리고 '이용'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만 말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와의 일종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유불리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은 필수다. 이 '기본'을 상기해야 한다.

댓글 2

김재호님의 댓글

김재호

  popper's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봐야 합니다.

최성우님의 댓글

최성우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포퍼 뿐 아니라, 그의 라이벌(?) 격인 쿤 역시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그의 패러다임 이론을 극단적인 과학사회학자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다보니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치부되기도 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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