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공포..유럽을 침몰시키나

2010. 5. 2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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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통화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끊임없이 팽창(인플레이션)하든지 아니면 팽창을 멈추는 순간 바로 연쇄적인 수축(디플레이션)으로 돌아서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불편한 경제학, 세일러 지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회복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우려됐던 세계 경제에 남유럽발 재정위기가 불거지면서 반대로 디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전 세계 각국이 취했던 확장적 통화 및 재정정책 기조를 거둔다는 '출구전략'이 복병을 만난 셈이다.

물론 유럽의 재정긴축 움직임은 어쩌면 출구전략이 활용하고자 했던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유럽은 그리스발 재정위기가 터지기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재정위기가 유럽 내 도미노처럼 확산될 우려가 높아진 상황에서 각국의 긴축정책은 과거처럼 물가를 잡는 데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산가치 폭락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1100억유로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 재정위기에서 보듯이 많은 유럽 국가들의 경제 기초체력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보다 오히려 약화됐다.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는 소비 감소보다는 자산가치 급락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에서 촉발됐다. 부동산 가격이 침체되면서 부채를 끼고 부동산을 구입했던 가계가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일본이나 2008년 미국은 자산 디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이 위기가 심각한 디플레이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때 각국이 긴축정책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확대하는 공조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 당시 주요 20개국(G20)이 긴축적인 보호주의를 폐기하고 경기부양에 나서면서 전 세계적인 동반 경기침체, 디플레이션을 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최근 디플레이션 발생 우려의 최접점은 유럽이다.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 경기회복 기미가 보이자 그리스발 금융불안이 꿈틀대면서 또 다른 위기가 잉태됐다. 과도한 재정적자 문제로 유럽의 문제아로 전락한 그리스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유럽을 강타하고 있다. 유로존이 구제금융을 위해 7500억유로의 재정안정기금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오리무중이다. 여기에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악화된 경제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쏟아부었던 재정 지출이 향후 국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면서 나라마다 재정건전성 확보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영국은 올해 공무원 임금을 5% 삭감하고 연내 공공지출을 60억파운드나 줄이기로 했다. 프랑스는 내년부터 3년 동안 정부지출을 동결키로 했고, 독일도 올해 연금총액을 동결하고 연금수령 연령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포르투갈이나 아일랜드 등도 공무원 임금을 삭감하기로 했고, 많은 유로존 국가들이 다리나 공항 건설 등 공공 인프라스트럭처 건설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이러한 긴축 조치는 추가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고 경기회복에 상응해 재정을 연착륙시킨다는 목표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유럽으로서는 리먼 사태 이후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정건전성을 개선하기 위한 긴축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최근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의 금융불안이 이어지고 있고 국가마다 재정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추가적인 긴축은 경제 활기를 잃게 만든다. 실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미국이 디플레이션 악순환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재정의 힘' 때문이었다. 확산된 공포 심리로 시장 기능이 점차 마비되는 상황에서 재정이라는 '모르핀'을 투여했던 것이다. 유럽이 2008년 금융위기에서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정 투입을 줄이는 것은 디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는 115.1%나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에 따르면 2010년 133%, 2015년에 140%까지 올라간다. 이탈리아나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국가채무가 2015년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난다. 2031년이 돼야 적정수치인 GDP 대비 60%에 도달할 것이라는 게 국제경영개발원(IMD)의 분석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은 90년대 후반 디플레이션 악순환 기미가 나타나긴 했지만 재정의 힘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가 오래가지는 않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지금 남유럽에서 우려되는 것은 이 같은 재정의 힘에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 등 남부 유럽 위기의 시발점이 재정 적자 심화이기 때문에 정부의 힘으로 경제를 살릴 만한 여력이 크지 않다. 더욱이 세계 경제가 과거보다 긴밀히 연결돼 있고, 인터넷 등으로 심리적 거리감이 줄어든 마당에 디플레이션 공포는 어느 때보다 큰 것이다. 유럽 바깥의 환경도 여전히 좋지 못하다. 누리엠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남유럽발 금융위기로 미국의 더블딥(경기상승 후 재하강)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최근 유럽 재정위기는 유로존 자체의 문제에다 아직 회복되지 않는 미국 경제, 일본의 만성화된 경기침체, 중국의 출구전략 우려 등으로 디플레이션 망령을 전 세계로 확산시킬 수도 있는 일촉즉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만약 남유럽발 재정 위기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유럽 전체로 전이된다면 제2 세계경제 위기로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아직까지는 그럴 개연성은 높지 않지만 디플레이션 확산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으로 오는 위기보다 수요 및 공급의 붕괴가 이어지는 디플레이션이 헤어나오기 더 힘들다"고 말했다.

채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유럽발 디플레이션 위험이 존재한다"며 "스페인에서는 이미 물가 하락 현상이 나타났는데 남부 유럽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로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 디플레이션의 역사

1929년 미국 대공황 대표적인 디플레이션 일본도 '잃어버린 10년'

금융위기는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 때 발생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산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폭등하는 '버블'에서 깨어나는 것이 디플레이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929~1933년 진행된 미국 대공황이 그랬다. 미국 주식시장이 장기 호황을 맞으면서 중산층은 너도나도 주식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파국을 맞았다. 버블이 꺼지면서 비롯된 디플레이션 여파로 인해 개인과 기업들이 빚잔치를 통해 파산하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됐다.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그리고 2010년 유럽 재정 위기 상황도 디플레이션을 통한 자산가치 급락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물론 유럽의 디플레이션은 아직 뚜렷이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확산 우려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여전히 '저성장, 저물가, 고실업'이라는 삼중고에 갇힌 채 디플레이션 수렁에 빠져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1월 공식적으로 디플레이션이 도래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06년 6월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한 지 3년여 만에 재발한 것이다. 일본 경제는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고평가된 엔화를 바탕으로 국내외 부동산을 사들이는 등 최고점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경기 과열을 우려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2%대에서 6%로 올리면서 시민들은 빚더미에 앉았고 주식 등 자산가격 급락, 실업률 상승, 내수 감소 등으로 경기는 크게 후퇴했다.

일본은 1990년대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보냈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잃어버린 10년'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 경제주체들은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자산은 줄어들지만 부채 수준에는 변화가 없다"며 "디플레이션은 결국 자산 대비 부채 부담이 커지면서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길고 긴 'D의 함정'

한 번 발 잘못 딛으면 좀체 헤어나기 힘들어 '경제의 악마'로 불릴 정도

디플레이션은 쉽게 얘기하면 우리가 늘 걱정하는 인플레이션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소비나 투자 감소, 통화량 수축 등에 의해 명목물가가 하락하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은 자산가치 하락→소비 감소→투자 위축→고용 축소→소득 감소→다시 소비 감소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여기에 경제가 계속 침체될 것이라는 공포심리가 악순환의 고리를 자극하면서 경제 주체들이 공멸하는 시나리오로 이어진다.

디플레이션은 이러한 수요 감소 외에도 반대로 공급이 과잉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공급과잉이 기술 진보나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발생하고 이것이 제품 가격하락으로 이어진다면 국민경제 전체로는 긍정적일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중국이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 저가상품을 공급해 물가부담을 완화시킨 것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가격이 하락하는데도 수요 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장기화되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디플레이션 기간은 2년 넘게 물가하락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공급 증가나 수요 감소에 따른 가격 하락은 기업의 채산성을 악화시켜 고용 축소를 야기하고, 이는 개인이나 가계의 소비를 더욱 줄이는 순환고리를 형성해 물가는 계속 떨어진다. 부자들도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지갑을 닫게 되면 경제는 활기를 더욱 잃어간다. 절약과 저축으로 칭찬받았던 일본이 '저소비의 덫'에 걸려 성장이 멈추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정부의 재정지출도 소비와 마찬가지 효과를 갖는다. 소비(가계), 투자(기업), 재정지출(정부)의 합산은 국민총소득을 구성하는데 소비 감소나 재정지출 항목의 감소는 효과가 똑같다. 정부는 경기침체를 막고 최소한의 부양을 위해 개인이나 가계와 달리 인위적으로 지출을 늘릴 수 있을 뿐이다. 대공황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케인스 경제이론에 따라 대규모 공사를 발주하는 등 재정지출을 크게 늘렸던 것이 그 예다.

[김병호 기자 / 안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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