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의 굴욕, 국가R&D기획단 ‘10년 먹고살 사업’ 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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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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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존폐위기

황창규 기획단장
황창규 기획단장
지식경제부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단장 황창규)이 야심 차게 추진해온 대형 국가미래사업이 예산 미확보로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출범 1년 만에 기획단의 존폐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기획단은 국가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으로 6개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을 선정한 뒤 내년 예산으로 1561억 원을 신청했지만 예산 관련 부처를 거치면서 94.2%가 삭감된 90억 원만 배정받았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태호 의원이 5일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기획단은 △디스플레이(투명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심해자원 생산용 해양플랜트) △인쇄전자(인쇄전자용 초정밀 연속생산 시스템) △그래핀(다기능성 그래핀 소재 및 부품) △SMR(다목적 소형 모듈 원자로) △뉴로 툴(뇌-신경 IT 융합 뉴로 툴) 등 6개 사업을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으로 추진했지만 그래핀, SMR, 뉴로 툴 등 3개 사업은 예산을 한 푼도 배정받지 못했다.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 인쇄전자 사업에 대해서도 각 294억, 308억, 210억 원을 내년도 예산으로 요청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와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를 거치면서 각각 30억 원으로 일괄 삭감됐다.

예산 삭감의 근거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다. 이에 따르면 6개 사업의 순현재가치(NPV·사업의 최종 연도까지 얻게 되는 편익 대비 비용을 현재가치로 계산)는 ―4772억 원이며, 비용 대비 편익(B/C)도 0.61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 B/C가 1보다 낮으면 비용 대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기획단은 2012∼2018년 6개 사업에 대해 1조5000억 원(정부 7500억 원+민간 7500억 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했지만 평가원은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 인쇄전자 등 3개 사업에 정부 예산 2045억 원을 포함해 총 5860억 원만 투입하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기획단 관계자는 “평가기관이 장기적인 안목이 아닌 현재 관점에서 성과만을 따진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6개 국가전략사업 중 3개 예산 전액 깎여 ▼

○ 2025년 380조 원 매출 기대했지만…

기획단은 예산 배정에 대해 크게 낙담하고 있다. 황 단장은 4일 지식경제위원회 국감에서 “반도체에 이은 (차세대) 국가 대형 먹을거리 예산이 굉장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획단 관계자는 “63빌딩을 짓겠다는데 정부는 연립주택을 지을 돈만 준 셈”이라며 “이 돈으로는 사실상 3개 사업도 예정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획단은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 후보 품목으로 490건을 선정한 뒤 1년 동안 세계 최고 석학을 만나고 전문가 800명과 180회 이상의 회의를 거쳐 6개 사업을 엄선했다. 시장성, 기술성, 공공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해 3월 “전략기획단을 출범시켜 미래 먹을거리를 위한 파일럿 성격의 대형 선도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지경부의 보고를 받고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직접 지시한 바 있다. 기획단은 지난해 12월 ‘2011년 연두업무보고’ 때도 추진 내용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반도체, 휴대전화, 액정표시장치(LCD)에 이어 미래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산업으로 2018년까지 1조5000억 원을 투입해 2025년 380조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예컨대 황 단장은 SMR에 대해 “원전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담보하고 전기 생산, 지역난방과 담수화 설비에도 쓸 수 있다”며 “전량 수출해 2025년 매출 11조5000억 원을 올릴 수 있는 기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평가원의 예비 조사에선 타당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예산 삭감으로 사업 참여를 준비 중이던 대기업과 중소기업들도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번 사업은 정부와 민간기업이 절반씩 비용을 대는 매칭사업으로 진행된다. 1단계 원천기술 개발 때는 2배수의 컨소시엄을 선정한 뒤, 2단계 최종 응용기술을 개발할 때 그중 1개의 컨소시엄을 선정하겠다는 계획이다. 64개 대기업과 145개 중소기업이 컨소시엄 참여 의사를 밝히는 등 민간 기업들의 호응이 컸다. 그러나 3개 사업이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104개 기업이 참여 기회를 잃었고 나머지 3개 사업에 참여하려는 업체들도 예산 축소로 참여 기회가 거의 사라질 처지다.

○ 앞뒤로 위기에 봉착한 기획단

R&D기획단은 4조5000억 원에 이르는 R&D 예산이 관료 중심으로 운영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돼 지난해 6월 출범했다. 당시 정부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을 단장으로, 민간 전문가 5명을 MD(Managing Director·투자관리자)로 영입했다. 지식경제부 장관과 황 단장이 기획단 회의의 공동위원장을 맡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백성기 전 포스텍 총장 등 10명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획단은 R&D 예산의 ‘컨트롤타워’ 역할과 300억 원 이상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을 발굴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R&D 예산 컨트롤타워 역할은 기획단의 애매한 법적 지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획단은 올 11월부터 ‘산업기술혁신촉진법’에 따라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장관급인 기획단 단장이 차관급인 원장 산하에 놓이는 셈이다. 기획단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의 소속인 기획단이 지경부 R&D 예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기존 관료들이 민간 전문가 출신이 포진된 기획단을 견제하기 위해 예산 배정에 인색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기획단의 한 간부는 “사업에 대한 예산을 못 받았다고 조직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며 “예산이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사업은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기획단은 다시 치밀하게 사업을 준비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야 하며 정부와 국회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미래 먹을거리 산업 투자에 인색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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