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앙일보〉 고위직을 지낸 이에게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고백하기를 자신에게는 삼성 이건희 회장한테서 비밀리에 부여받은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감시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회장이 자기 처남을 인간적으로도, 일로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라도 〈중앙일보〉나 삼성까지 넘보지 않을까 싶어서 항상 경계한다는 말도 했다.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한테서도 그와 맥이 닿는 얘기를 들었다. 1999년 〈중앙일보〉가 삼성그룹에서 완전 분리해 홍씨 일가의 소유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회장이 〈중앙일보〉를 홍 회장에게 넘겨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중앙일보〉 지분을 매입할 돈이 없었던 홍 회장은 대주주 대리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법적인 주인은 여전히 이건희 회장이라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었다. 그는 실질적인 의결권을 이 회장이 행사한다는 이면 계약서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의 공범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면서 두 집안의 힘겨루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갑자기 리움박물관 관장직을 내놓자, 몇몇 언론은 이재용씨가 구치소 안에서도 홍씨 집안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추측을 쏟아냈다. 홍 회장이 아들에게 〈중앙일보〉 경영에 관한 전권을 물려주고 물러나겠다고 선언하자 ‘이제 〈중앙일보〉는 완전히 홍씨 집안 소유가 됐다는 자신감의 표현 아니겠느냐’는 얘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홍라희씨가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상속받으리라는 예측과 맞물려 양쪽 집안의 싸움은 〈중앙일보〉를 넘어 삼성 내부로까지 확산됐다는 말들이 돌아다닌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삼성은 지난 2분기에 최고 실적을 올렸다.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14조원. 우리 언론들의 요란한 수식 솜씨를 빌리자면 세계 IT 업계의 양대 산맥인 애플과 인텔을 제치고 기어코 왕좌에 올랐다. 반도체가 영업이익의 거의 60%를 차지해 삼성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런 대단한 기업의 주인이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부럽지 않은, 살아 있는 신이라도 된 듯 자아가 터질 듯 부풀어오르지 않을까. 그러니 부모·형제·사돈이 안면을 바꾸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싸움을 해대는 게 아니겠는가.

ⓒ한성원 그림

경제부 기자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서도 예전부터 품어온 의문이 하나 있었다. 오랜 식민 통치에 신음했고, 광복을 맞자마자 바로 전란을 겪은 가난한 나라의 기업인 삼성이 오늘날 어떻게 미국 실리콘밸리의 거인들과 어깨를 겨루게 됐는가 하는 점이었다. 반도체를 기업의 성장동력으로 삼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선견지명과, IT 시대에 걸맞은 이건희 회장의 은둔형 리더십을 찬양하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퍼즐 한 조각이 빠졌다는 느낌이었다.


의문은 6월19일자 미국의 경제 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를 보고 풀렸다.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도체 산업의 유해성을 다룬 기사였는데 ‘반도체 칩 제작이 아시아로 옮아갔고, 그 뒤를 유산과 기형아 출산이 뒤따랐다’는 제목의 특집 기사였다. 그 기사를 읽고 삼성의 진짜 주인은 이씨 집안도 홍씨 집안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성의 주인은 엄연히 따로 있었다.

1984년 어느 날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의 역학 전문가 해리스 패스타이즈는 역학조사 역사에 길이 남을 아주 보기 드문 작업을 시작할 기회를 잡는다. 반도체 회사에서 직업병 관리를 맡은 졸업생으로부터 생산라인에 있는 가임 여성들이 유산하는 사례가 잦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미국 기술 산업 일자리의 68%를 젊은 여성이 점하고 있었다. 반도체 라인 노동자들은 이른바 클린룸에서 우주복처럼 생긴 방호복을 입고 일하지만 그들이 아니라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은 수많은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돼 있었고 때로는 그것을 직접 만졌다. 업계에서는 그들 여성 노동자 중 비정상으로 많은 숫자가 유산, 기형아 출산, 암 발병, 생리 불순을 경험한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그 졸업생이 다니던 회사인 디지털 이큅먼트 사는 패스타이즈 교수 팀에게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제조업체가 스스로 돈까지 대고 조사를 의뢰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패스타이즈 팀은 2년 만인 1986년 결과를 내놓았다. 충격이었다. 반도체 플랜트에서 일하는 여성의 유산율은 평균보다 두 배나 높았다. 역학조사에서 이렇게 똑 떨어진 결과가 나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11월에 회사는 직원들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렸다.

IBM과 인텔을 비롯한 반도체 업계의 거인들은 비상이 걸렸다. 협회(SIA)는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패널을 패스타이즈 팀에 보냈다. 1987년 1월 패스타이즈 팀과 업계 사람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다. 나중에 패스타이즈 교수가 “섬뜩했다”고 표현했을 만큼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토론을 마친 뒤 회사 측 대표들은 공식 보고서에 “조사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여론은 조사팀의 편이었다. 그들은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

반도체 회사들은 하는 수 없이 더 깊이 있는 조사를 하기로 하고 비용까지 댔다.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노동자 건강에 관한 조사가 벌어졌다. 협회 소속 14개 회사, 42개 플랜트, 노동자 5000명이 대상이었다. 다른 회사보다 작업장이 훨씬 안전하다고 자부했던 IBM은 따로 존스홉킨스 대학 팀에 조사를 의뢰했다. 업계가 모든 돈을 댄 세 개의 조사 결과는 거의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의 유산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며 원인은 칩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독성물질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과가 나온 1992년 협회는 작업장에서 독성물질을 몰아내겠다고 선언했다. IBM은 한발 더 나아갔다. 1995년까지 모든 글로벌 작업장에서 반도체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산업재해 분야에서 동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화의 결말은 잔혹하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임금이 싸고 노동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 바로 한국으로 옮아갔다. 작업장에서 독성물질을 몰아내겠다는 미국 반도체 업계의 다짐까지는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미국의 여성 노동자를 대신해 한국의 수많은 여성과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이 그 대가를 치렀다.

반도체 업체가 노동조합을 병적으로 기피하는 까닭

반도체는 물리학이 운전하는 화학제품이다. 실리콘 기판에 빛과 화학약품을 결합해 회로를 새기는 게 기본 제작 방식이다. 1960년대에 현대적 집적회로를 만들어낸 인물 중 한 명인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는 화학자이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우리는 반도체에 실로 역겨운 많은 화학약품을 첨가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화학약품의 위험성에 아무런 경각심이 없었던 초기에 인텔은 그것을 하수도에 마구 버렸다. 나중에 인부들이 인텔 작업장의 바닥을 뜯어냈을 때 거의 모든 파이프가 걸레가 된 걸 보고 경악한 일이 있을 정도이다. 화학물질 가운데는 특히 포토레지스트라고 불리는 감광액에 포함된 EGEs(에틸렌 글리콜 에테르)의 독성이 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미국에서 세 개 조사가 나온 뒤 협회나 IBM이 가장 신경 써서 추방하겠다고 한 독성물질이 바로 EGEs였다.

IBM으로부터 조사를 의뢰받은 존스홉킨스 대학 연구팀은 EGEs에 관해 IBM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싸고 효과적이고 풍부하다. 대체물은 덜 위험하지만 훨씬 비싸다. 해외에서는 그대로 쓸 가능성이 높다.”

이런 보고서를 받은 바로 그해인 1995년 IBM은 한국의 삼성, SK하이닉스와 5년간 반도체를 대량 구입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두 회사 합쳐서 1650억 달러어치를 구입하겠다는 파격적인 계약이었다. IBM은 이 같은 계약 사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한국의 두 회사는 자국의 언론에 자랑하기 바빴다. IBM의 뒤를 이어 1996년부터 미국 협회 소속의 모토롤라,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HP, 인텔이 삼성으로부터 칩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95년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는 세계시장의 강자로 떠올라 2015년에는 반도체의 74%라는 경이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게 됐다. 이게 삼성과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본모습이다.

반도체 업계는 유난히 비밀이 많은 곳이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의 고위 관리자가 자기 건강 때문에라도 조심하려 애쓴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성분을 알기 힘든 화학약품이 들어간 부품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노동자들이 도대체 어떤 물질에 얼마나 노출되는지 모니터링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 업계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노동조합을 병적으로 기피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역시 기업가가 무슨 수를 쓰든 노동조합이 생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삼성이 오랫동안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룹 차원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막았던 것은 창업자인 이병철씨의 유지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1995년 대량 구입 계약을 맺으면서 노동자의 안전 문제에 관한 조항을 넣었느냐는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의 질문에 IBM도 삼성도 침묵했다. 백혈병과 뇌경색, 유산을 경험한 삼성의 전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수뇌부가 사인하는 순간 노동자에게 닥칠 위험을 몰랐을까. 나는 알고도 남았다는 데 걸겠다. 삼성의 막대한 부는 수많은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과 눈물, 그리고 거짓말 위에 쌓아 올린 것이다. 게다가 병에 걸린 아이들, 곧 한국의 미래를 위협한 대가이다. 지금 삼성의 작업 라인에 있는 여성 노동자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1995년 이전에 근무했던 노동자의 집단소송에 골머리를 앓는다. 한국에서 삼성을 거쳐간 여성 노동자가 한꺼번에 소송을 낸다면, 판결이 공정하다면 삼성의 주인이 바뀌고도 남을 일이 그동안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참고한 활자:〈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 〈프레시안〉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