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 근성' 버립시다..공대 출신 기자가 하고픈 얘기 - 신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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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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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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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과학기술 기사를 쓰고 있는 40대 초반의 기자입니다.

위기 속에 봇물처럼 다양한 진단과 대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희망을 발견합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나 할까요.

이공계 위기를 지켜보면서 평소 생각해왔던 것이 있어 적어 봅니다.

 

사회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신문사에서도 이공계 출신이 푸대접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공계 출신으로 어렵게 신문사에 들어간 선후배들이 신문마다 3-4명 정도씩은 되지만,

IMF 사태 이후 많은 분들이 신문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쫓겨났습니다.

또 벤처바람에 뛰쳐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열기가 식으면서 어렵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졸업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공대에 진학했었습니다.

물론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약간은 있었지만,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엔지니어로서 첫 직장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언론계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마 이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저처럼 안정된 직장이 보장된다기에 이공계 대학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 4-5년 사이에 이런 기대가 물거품이 되니 상실감과 박탈감도 상대적으로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우리 좀 생각해봅시다.

저는 누구에게나 잘먹고 잘 사는 것이 지상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하나 더붙이자면 '잘 번식시키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공계 논의에서 '돈과 대우 그리고 명예'는 매우 중요한 핵심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똘똘 뭉쳐 취업난, 박봉, 해고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가 과학기술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나라도 잘 되겠지요.

다시 말해 과학기술자의 권익찾기 운동은 진정한 '애국운동'입니다.

그래서 www.scieng.net이 과학기술자 권익찾기 운동의 선봉에 나서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공계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공계 출신 특유의 '잘 먹고 잘 살기 철학'에 비판의 칼날을 대보고자 합니다.

이 철학이 조선시대 이래 면면히 내려오는 '중인 근성'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생각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중인 근성'을 깨야 이공계 출신들이 잘 나가고 나라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인 근성을 두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나라가 어찌됐든 나만 잘 되면 그만 아니냐(또는 내가 나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주인의식보다 빌붙어 살려는 근성입니다.

 

조선시대 때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은 양반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중인은 나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라 일을 문과 출신 사람들이 다 하니까, 나는 기술만 하면 되지 하는 그동안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조선시대 때도 그저 기술 하나 가지면 먹고살기 편했습니다.

노비 출신 중에서도 기술을 열심히 배워 양반이 된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대표적인 사람이 만원짜리 지폐 뒷장에 나오는 자격루를 발명한 장영실입니다.

노비 출신인 장영실은 한국 최초의 자동 제어장치인 자격루뿐 아니라 무수한 기계를 발명해 양반이 됐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마차를 만들었다가 이것이 부서지는 바람에 곤장 수십대를 맞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건은 지난 수백년 동안 무수히 반복됐고, 큰 변화없이 이공계에 진학한 학생들에게까지 '중인 DNA'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서구사회의 경험은 달랐습니다. 거기서는 과학기술자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도킨스, 호킹 등 헤아릴 수 없는 과학자들이 르네상스 이래 정신사적 혁명의 맨 선두에 선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들의 발견은 인문사회과학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쳤습니다.

 

굳이 에디슨이나 포드를 예로 들지 않아도, 자동차, 기계, 로켓, 우주선, 컴퓨터, 모터, 세탁기, 텔레비전, 반도체 등을 발견한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서구사회에서는 모험을 각오하고 기업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공과대학은 학생들에게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s)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딴 한국의 이공계 출신들은 10명이면 9명은 대학 교수가 되려고 합니다.

한국의 '이공계 중인'들은 '학자 양반'이 되는 손쉬운 길로 대학교수가 되고자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공계 박사의 77%가 대학에 있고, 기업에는 10%밖에 없게 됐고, 이러니 나라가 잘 될리가 없습니다. 미국은 이공계 박사의 거의 40%가 기업에 있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사회의 부를 축적하는 데 기여하기 보다 '철밥통'에 너무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공계 출신에 대한 사회의 인식 또한 좋을리 없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역사에서는 과학기술자가 지적 혁명의 선두에 섰거나,  자본주의 사회의 부의 축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경험이 불행하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룩한 근대화는 수입한 기술과 과학으로 하거나 모방한 것이지, 우리 과학기술자가 독창적으로 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저 과학기술자는 명령만 내리면 전진하고 기술을 복제해오는 근대화의 총알받이였지, 역사의 주체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과학자와 기술자야 말로 '현대사회의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문사회학자들이 얼마나 과학책을 열심히 보고 있는 줄 아십니까?

과학이야 말로 새로운 지식을 퍼올리는 샘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경제학자와 경영인들은 IT, BT 등의 신기술의 향방에 매우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부와 가치가 나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닌 힘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공계 출신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려면 무엇부터 해야할까요.

말씀드린 대로 과학기술자의 권익찾기운동과 함께 지식인 운동의 전면에 나서야 합니다.

지식인 운동은 과학기술 뿐 아니라 경제, 교육, 통일, 국방,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각 분야를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과학기술을 국민에게 대중화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식인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자 권익찾기 운동과 지식인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려면 저는 우선 두가지 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조직이고, 둘째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확보입니다.

우선 과학기술자들이 어떤 하나의 단체로 조직돼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노총, 교사는 교총과 전교조, 의사는 의협, 약사는 약사회, 변호사는 변호사회 등으로 뭉쳐있습니다.

과학기술계에는 과총이 있지만, 많은 젊은 과학기술인이 이곳을 양노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제가 10년 여년 전 과학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양노원'이라고 썼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또 하나 교사, 노동자, 의사, 변호사 어떤 직종을 보더라도 그 직종 내부의 사람들이 모두 보는 신문이나 잡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자들은 공유하는 신문 잡지가 없습니다.

과학기술계에는 결정적으로 선장과 조타수, 의사 소통 체계가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 목표 의식은 강했지만, 집단적 노력은 약한 것이 이공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의견 결집이 되지 않고, 정부의 정책에 대한 의견의 투입과 압력, 감시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제 중인의식에서 벗어나 조직과 의사소통 체계를 만듭시다.

저는 www.scieng.net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네트웍을 이끌고 있는 박상욱 군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냅니다.

조선이 양반 싸움으로 망했듯이,

과학기술을 모르는 문과 출신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조국의 장래 역시 매우 불투명합니다.

이 네트웍이 우리의 희망과 나라의 희망을 자아내는 실 올타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계돌이' '공돌이'라고 자기 비하하지 맙시다.

이것도 중인 근성인지 모릅니다.

 

 

동아사이언스 신동호 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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