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2)

글쓴이
박상욱
등록일
2005-04-06 17:18
조회
3,8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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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건
(참고: 제목에 있는 그 '이유'는 맨 마지막 글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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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2) : 우리가 과학기술정책이라 부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과학학(science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다. 메타과학이라고도 하는데, 연구의 대상이 과학인 학문을 말한다. 즉, 과학 자체의 속성에 대해 연구한다. 당연히 과학사, 과학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일부는 과학사회학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에는 과학학을 '과학기술학'으로 고쳐 부르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앞의 글에서 말한 대로 과학기술을 붙여 쓰는 경향에 따른 것이며, '기술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원래 별도로 있다가 과학학과 통합된 것은 아니다.('기술사'라는 분야는 과학학의 한 분야로서 있지만)

 과학을 객체로 놓고 연구를 하다 보면, 세계 각국이 어떻게 과학을 진흥시켜 왔는지, 과학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지원은 어떤 계기로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가 궁금해 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형성되는 말이 '과학정책' 이다. 즉, 과학을 융성하게 하려는 정책인 것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과학적 지식은 인류 공동의 소유물이고, 과학자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 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과학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러한 '숭고한' 의미를 부여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인위적, 정책적 육성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오직 과학을 전유하는 과학자, 특히 한 세대에 한두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적 과학자에 의해 자발적이고도 예측 불가능하게 발전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필자는 이런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기초과학에 대한 혁신체제론적 입장은 뒤의 글에 다룬다)

 따라서, 제목에서 '기술'이 빠진 과학정책이라는 분야는 태생적으로 위태로운 존립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은 과학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나, 직접 산업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제정책의 하부로서의 산업정책, 산업정책의 하부로서의 기술정책이라는 수직계열상에 정책분야의 이름을 당당히 걸고 있어 오히려 단단한 기반과 역사를 갖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도 "과학정책은 없다. 과학을 위한 정책이거나, 기술정책이거나, 넓게 봐서 과학기술정책이 있는 것이다" 라는 의견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과학학에 기반하여 정책쪽으로 뻗어 가려는 일부 학교와, 유독 과기정책 분야에서만큼은 '고전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일부 연구소(RAND institute 등)에서 science policy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산업정책과 기술정책은 무엇인가? 일단 산업정책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인 듯 하다.(미리 말하는데 필자는 정책 전공자가 아니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임을 밝힌다.)

 산업정책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15,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항해시대를 맞아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 차례대로 '중상주의'를 견지하게 된다. 중상주의는 말 그대로 상업과 무역을 중시한다는 말인데, 특히 자국의 해운업 보호 육성을 위한 정책을 펴게 된다. 이 시기는 해군력이 곧 국력이었던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항해조례'(자국 수출입 상품은 자국 선박만을 이용하도록 하는 조례)는 정부가 자국 상업 보호 육성을 위해 정책적으로 개입한 극명한 예이다.

 산업혁명 이전부터 서구 여러 나라에는 자국내 제조업 또는 농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한 정책이 채택된 바 있다. 이는 주로 관세율를 조정하거나 특정 상품에 대한 수출,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개입주의적' 산업정책을 무역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와 대척점에 놓고 분석하거나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관세와 자유무역의 문제는 이 글의 논점에서 벗어나므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자세한 것은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 참조)

 이러한 개입주의적 산업정책은 산업혁명 이후 제조산업분야의 선진국들을 따라잡으려는 후발국(독일, 프랑스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개입주의적 산업정책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공고해졌으며, 전쟁의 피해가 컸던 프랑스나 패전국인 독일은 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또다시 강력한 개입적 산업정책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19세기 초까지 최고의 부국이었다가 19세기 말 침체기를 겪은 네덜란드의 경우도 1960년대까지 강력한 산업정책을 유지하였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고 바닥부터 시작한 한국이나,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 역시 정부주도의 산업 육성밖에는 대안이 없었으며 거의 유착 또는 융합에 가까운 정부-산업 연결이 당연시되었다. 금융 역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정책적 도구였으므로,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이라는 말이 현시대에 대단히 나쁜 어감을 갖는 데에 반해, 완화된 표현으로 '정부-산업 파트너십' 이나 '정책금융'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개입주의적 정책기조는 1960년대 당시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금도 동북아 공업국과 독일, 프랑스 등은 정부의 산업정책이 강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고, 이제야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도 특유의 사회주의적 기반-정부와 산업이 아예 하나라는-을 바탕으로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소위 IMF 사태) 이후 앵글로-색슨 계열의 외국자본에 의해 국내 금융시장의 대수술과 기업 지배구조의 변혁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몰아닥쳤다. 신자유주의는 개입주의와 극성이 맞지 않는데, 앵글로-색슨계열의 혁신모델이 반드시 선진국의 유일한 모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우리 것은 후진적이고 신자유주의는 선진적이라는 식으로 문을 활짝 열어 준 결과, 산업정책과 경제정책의 엇박자가 발생하였다. 산업정책은 여전히 개입주의적인데, 금융과 기업 지배구조만 자유주의적인 이상한 상황이 벌어져서, 기업들은 한마디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길어지기 전에 자르자. 개입주의적 산업정책이라는 것의 포지셔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든 예일 뿐이다.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는데, 산업정책의 역할과 예시, 기술정책, 기술경제학, 기술경영학 등은 다음 글로 넘긴다.

  • 임호랑 ()

      잘 읽었습니다.

    적절한 문제제기이고, 문제 전개과정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저도 혁신체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데, 과학기술 분야에 일반적 혁신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역으로 과학기술 발전이 혁신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21세기 거버넌스나 시스템 혁신을 거론할 때 e-비즈니스 및 IT 등의 기술혁신, BT, NT 등에 있어서의 과학혁명을 주된 동인(Acting Factor)로 봅니다. 그만큼 세계, 국가, 사회, 개인 영역에서 혁신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고, 여기에 프론티어 에지에 있는 과학기술(이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넓고 모호한)의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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