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5)

글쓴이
박상욱
등록일
2005-04-13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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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5) : 혁신’체제’란 무엇인가?


앞서 글들에서 과학기술정책을 구성하는 몇가지 정책들과, 혁신정책의 시대적 발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혁신체제론에 대해 본격적인 썰풀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혁신체제론 자체에 대해 좀 더 평설을 달아 보고자 한다.

혁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기가 어렵고 사람마다 다른만큼, 혁신체제(innovation system)에 대한 것 역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혁신체제란 일부러 노력해서 구축하고 가꾸고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혁신체제란 '혁신을 일으키기 위한 체제'이기도 하지만 '혁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체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혁신체제(national innovation system)은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섹터별로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하나의 시스템이며, 정책적으로만 보아도 하루아침에 '혁신체제를 구축하세~'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수많은 작은 정책들이 모여 작용하는 결과물이다. 또한 한 나라의 혁신체제는 그 나라 발전의 역사, 사회문화적 배경, 심지어 민족성까지도 투영이 되어 있는 그야말로 경제사회발전의 거대한 틀이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혁신체제'에서 왜 '체제(system)'라는 말을 사용하는지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혁신체제론 등장 이전의 혁신정책(또는 과학기술정책)은 앞서 살펴본대로 과학을 위한 정책, 기술을 위한 정책, 산업을 위한 정책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경제와 사회를 위한 정책은 과기정책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또한 각각의 기술, 산업 정책 역시 해당 분야에 그 영향을 국한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80년대 말까지 금융정책과 기술정책은 별 상관이 없었으며, 사회간접자본 정책과 산업정책 역시 원론적인 상호관계밖에 없었다. 90년대초까지 정보통신정책과 사회문화정책은 연결된 바가 없다.

대학에 대한 정책은 교육부에서, 정부출연연구소에 대한 정책은 과기부에서, 산업체에 대한 정책은 산자부에서 맡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정책 뿐 아니라 역할과 발전 역시 '각자 플레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은 대학대로,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노력하여 최선을 다했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최상의 성과를 내자'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법과 제도 역시 대학에 대한 것, 연구소에 대한 것, 기업에 대한 것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혁신체제론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설명하려 노력한다.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혁신체제론이라는 이론이 먼저 탄생하고 그 다음에 각국에서 그 이론을 좇아 정책을 편 것이 아니라, 각국이 처한 경제적 발전 단계와 국제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그에 맞추어 최적의 노력을 펼치다 보니 그것을 시스템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걸맞을 것 같아 혁신체제론이 탄생한 것이다.(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이든 정책이든 선진국 추종형이다보니 이론이 먼저 수입된 면이 있는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80년대 이후 기술이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기술이전촉진법이 제정된 것은 지난 2000년이지만, 미국이라고 하여 수십년 빨랐던 것은 아니고, 20년 정도 앞서서 기술이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사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이나 출연연에서 기업에 이전할 정도의 기술이 생산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본다)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에서 다소 '막연하게' 또는 순진하게 개발했던 기술이 기업에 이전되어 '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대학, 공공연구소, 그리고 기업의 연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산학연 연계의 탄생이다. 대학과 연구소마다 TLO(기술이전지원조직)가 설치되었다.

기술이 이전되거나 쓸만한 기술을 들고 공공부문에서 민간부문으로 나와 창업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벤처기업이라는 다소 새로운 형태의 혁신형 중소기업이 생겨났다.(벤처기업의 정의는 기술혁신을 무기로 창업하는 start-up 기업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벤처기업의 창업과 연구개발, 상품화와 제조설비 등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 벤처캐피탈과 함께 정부의 기업에 대한 연구개발 과제 형태의 지원, 또 정책금융이 생겨났다. 바야흐로 기술혁신을 위한 기술금융과 혁신 네트워킹 정책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개발을 독려하고 이를 '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이 돈이 된다는 인식이 필요했다. 특허관련 제도는 오랜 역사를 지닌, 지적재산의 관리를 통해 혁신을 독려하는 제도적 장치였는데, 이에 대한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면서 지재권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원과정 등이 생겨났다. 대학의 기술개발과 민간에의 이전을 독려하기 위해 베이-돌 법 같은 대학 직무발명 보상법이 시행되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과 Route 128의 사례에서, 또 독일의 아헨공대 등의 사례에서, 연구기능이 강한 대학과 기술혁신형 산업간의 지리적 모음의 성공사례가 분석되기 시작하면서 클러스터라는 개념이 탄생했다.(외국의 클러스터중 성공적인 것들 중에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곳은 거의 없다.) 돈 먹는 하마라서 민영화를 하던지 포기해야 한다던 공공부문 연구소가 민간과 대학이 채우지 못하는 빈칸을 메우며 정부가 직접 정책적 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재평가되면서 국공립 연구소와 정부출연연구소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연구회 체계 등이 탄생하여 공공연구부문을 정책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조건없이 예산을 퍼부어 전략적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고, 기업이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더 길어지기 전에 다 아는 얘기는 접도록 하자. 여러 얘기를 꺼냈는데, 전혀 새로운 얘기도 아니고 신기한 얘기도 아니다. 혁신체제론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껏 누구나 알고 있었던 얘기, 그저 필요해서 했던 일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는 것이다. 따로 진행되던 것들을 상호작용 시키는 것이다. 기업과 대학과 공공연구소간의 네트워킹을 강조하고, 일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을 강조하고, 모든 혁신활동의 선도적 지시자가 아닌 시스템 윤활자로서의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혁신체제론은 교육정책, 금융정책, 산업정책, 무역정책, 심지어 최근에는 노동정책과 사회정책까지도 아우르는 종합적 국가혁신전략이다. 모든 것은 혁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혁신체제론은 경제성장정책론이다. 혁신의 주체는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이다. 기업이야말로 혁신을 돈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혁신을 실현하기 위한 지식과 자원의 흐름의 정점에 기업이 위치한다.

혁신체제론에 대한 독자의 거리감을 다소 줄이기 위해, 순수 국산 혁신체제론을 짤막히 소개하면서 이번회를 마무리하려 한다. 고 김인수 교수는 유명한 '모방에서 혁신으로'라는 저서와 1993년 넬슨의 역저 'National Innovation Systems'의 한 챕터에서 한국의 국가혁신체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이분은 한창 일하실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혁신체제론의 초창기 국제적으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후진이 없어 국산 혁신체제론의 대가 끊기고 결과적으로 혁신이론의 발전이 10여년 뒤처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김인수 교수가 본 한국 혁신체제의 시발 부분에 필자의 해설과 의견을 약간 가미하겠다.

한국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고속 성장을 이뤘는데, 이는 잘 알려진대로 기술혁신에 힘입은 것은 결코 아니다. 값싼 노동력과 모방, 기술도입, 그리고 부수적으로 재벌체제와 수출지향적 정책, 높은 교육열 등이 고속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절까지의 대학에 R&D 기능따위는 없었고 국산 이공계 박사 배출 능력조차 거의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KIST와 정부출연연구소들을 설립, 운영했으나 산업계와의 연계의 정도는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80년대에 이르자, 종래의 성장전략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모방에서 벗어나 기술혁신과 기술역량 강화를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그 시절이 독재였다던가 하는 논의는 논외로 하자) 

80년대에 살살 불어온 정책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정부 개입을 줄이고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였다. 기술이전을 자유화하여 해외 기업의 기술투자 길을 열고, 기술중심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시행하였다.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산업정책이 전략 산업 육성과 유치산업 보호 정책으로부터 연구개발 독려와 인적자원 개발을 위한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많은 대기업들이 연구소를 설립했고, 연구비용에 대한 조세 감면 등이 이루어졌다. 병역특례 연구요원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이때 잠시 이공계 학사특례도 있었고, 석사장교제도도 있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특히 국가 예산에 의한 지원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GDP의 성장률을 웃도는 추세였다. 이 시기 대학원 기능이 아직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연구개발투자의 많은 부분이 공공연구소로 집중되었으며, 정부출연연구소의 황금기가 도래하였다. 기업에 대해서도 직접 R&D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국책은행에서의 금융이나 공공연구소와의 공동프로젝트등 간접적 방법으로 기업 R&D에 자금을 투입하였다. 또, 이 시기에 초보적 형태의 공공연구소-기업 협력과 대학-기업 협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서 공공연구소와 협력하는 경우가 생겨났는데, TDX의 개발은 대표적인 예이다.(이 경험이 90년대초 CDMA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대기업은 본격적으로 기술도입과 흡수에서 벗어나 in-house R&D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대덕에 KIST가 있었지만, 거의 모든 출연연과 대기업, 공기업 연구소가 모인 것도 이 시기의 일이며 정부의 의도적 '밸리화' 정책때문이었다.

김인수 교수는 80년대만을 보았기 때문에 90년대를 위한 제언으로 글의 결론을 내고 있는데, 주로 혁신주체간 연결고리의 부재(missing link)를 문제로 들고 있다. 여하튼 80년대 한국에 대한 그의 분석은 후발 개도국에 있어서 혁신체제의 형성과정을 다룬 것으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 주목을 받을만한 소재였다.(이 시리즈의 1편과 2편을 보면 선진국의 경우 혁신체제의 형성과 혁신정책의 태동은 최대 17세기까지 거슬로 올라가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은 나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혁신체제는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혁신체제 구축을 위한 정책이라고 하면 '시스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 즉 missing link의 연결, 지식과 자원의 원활한 흐름, 혁신을 지원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에 주안점이 있다. 혁신체제는 오랜 기간(한국을 예외로 하고)에 걸쳐 형성되며 국가의 역사와 환경, 강점과 약점에 따라 각기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국가혁신체제(national innovation system)'라는 말은 성립할 수 있으며 국가혁신체제란 '국가를 혁신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국가별로 각각 특색있는 혁신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미계통과 독일-일본이, 또 NICs의 혁신체제가 서로 다른 특색이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기회가 되면 다루겠다) 작년에 정부가 '국가혁신체제 구축방안'이라는 큰 그림을 발표했는데, 필자는 국가혁신체제 '업그레이드 방안'이나 '보완 방안' 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혁신체제는 없던 것을 새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 나름의 혁신체제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체제론을 구성하는 주요 키워드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아마 이번회에서 몇몇 익숙한 키워드들을 접하며 평소의 아리까리한 느낌이 되살아나 근질근질한 독자들이 계셨으리라 봅니다)   

(작년 발표된 정부의 국가혁신체제 구축방안 30대 과제에 대해서 혁신체제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시리즈 내에서 평설하겠습니다.)

  • Will ()

      요즘 뭐하는지 잘 모르겠는 박기영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께서는 혹시 이 글 읽으시면 느끼는 바가 있어 박상욱님을 그 자리에 천거하시고 강단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 Will ()

      박상욱님은 최소한 한 분야 학문에서 비조가 되실만한 역량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여지껏 박사학위하느라고 고생하신 것에 너무 구애 받지 마시고 학문분야를 개척했으면 하지만, 그 길이 너무 가시밭길이고해서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힘들 가능성이 높아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뭐하군요. 

  • 박상욱 ()

      헉.. -_- 심한 말씀을.. 리플 내려주시면 안될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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