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8천개의 진공관, 에니악(ENIAC)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4-04-24 12:53
조회
13,3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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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오늘날에는 가정이건 직장이건 컴퓨터를 쓰
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이자 디지털 문명을 상징
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컴퓨터는 인터넷 세상이 된 오늘날, 이제 단순한 문
명의 이기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생활 패턴과 패러다임을 뒤바꿔 놓은 지
오래이다. 만약 전세계의 모든 컴퓨터가 갑자기 없어져 버린다면 어떤 일
이 발생할 것인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진공에서 태어나다

그러면 이러한 컴퓨터는 누가 처음 발명했으며, 인류 최초의 컴퓨터는 어
떤 모습이었을까? 현대적인 의미의 컴퓨터가 발명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컴퓨터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계산기는 아주 오래 전부
터 사용되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는 기원전 500년 무렵 중
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보이는 주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유럽에서는 수
학자 파스칼(Pascal; 1623-1662)과 배비지(Charles Babbage; 1792-1871)가
기계식 계산기와 프로그램 연산을 고안함으로써 컴퓨터 발명의 토대를 마
련하였다.

아직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컴퓨터로 공인되고 있는 것은
바로 1946년 2월에 공개되었던 것은 에니악(ENIAC)이다. 펜실베이니아 대
학의 모클리(John W. Mauchly; 1907-1980)와 에커트( J. Presper Eckert;
1919-1995)가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한 전자계산기 에니악은 무게가 30톤이
나가는 거대한 덩치에 1만 8천개의 진공관을 달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소
비전력도 엄청나서, 에니악을 켤 때마다 그 일대의 전등이 모두 희미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과 공동 개발자 중의 한 사람
인 에커트는 2002년 전미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바 있다.


두뇌의 만남

에니악의 개발을 제안하고 주도한 모클리는 1932년에 존스홉킨스 대학 물
리학과에서 분자 분광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 출신이었다. 그
는 필라델피아 근처의 작은 지방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교양
물리를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여의치 않은 점
을 감안하여 직접 실험을 하지 않아도 연구를 할 수 있는 분야인 기상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방대한 기상 관측 자료를 분석하기 위서는 대단히 많은 계산이 필요하였
으므로, 모클리는 빠르고 쉬운 계산 수단을 찾기 위해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이 제 2차 대전에 참전한 이후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는
미 육군의 화기 탄도표 계산을 맡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모클리는 에커트
를 만나게 되었다. 에커트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레이더의 개
발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진공관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
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서 1942년 8월에 진공관식 대형계산기를 만들 계
획을 세웠고, 이 계산기의 이름을 에니악(ENIAC; The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이라고 정하였다.

에니악 개발 프로젝트는 핵무기 개발 등 역시 군사적인 목적에서 고성능
계산기를 필요로 했던 폰 노이만(Johann Ludwing von Neumann; 1903 ~
1957)과 같은 로스 알라모스 물리학자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행이 되었
고, 1945년 가을에 시험 가동에 들어가 1946년 초에 공식 완성되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묻혀진 또 하나의 스타

최근 들어서는 과거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에니악
과 비슷한 시기 혹은 그보다 앞서서 컴퓨터와 비슷한 것들을 만들었던 다
른 인물들이 관심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수학
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다. 그는 1937년 미국 유학시절에
컴퓨터의 개념을 담은 '튜링머신'을 수학적으로 고안해내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런던 근교에서 적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극비 프로젝
트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진공관을 이용하여 콜로서스
(Colossus)라 불리는 암호 해독용 기계를 만들었는데, 약 1,800개의 진공관
이 사용된 이 계산 기계는 종이 테이프를 통해 1초에 약 5,000자의 데이터
를 처리할 수 있었다.
콜로서스가 1943년 12월에 가동을 시작하였으므로 에니악보다 먼저 아니
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콜로서스는 암호해독이라는 특
수한 용도로만 쓰이는 데에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비밀리에 사
용되고 그 이후에는 단절되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컴퓨터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디지털 스타의 아버지의 아버지

에니악은 그 이후의 컴퓨터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흔히 '컴
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노이만은 기억장치가 없었던 에니악의 결점을 보
완한 컴퓨터 에드박(EDVAC)을 1950년에 완성하였다. 또한 진공관을 대체
하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에는 컴퓨터의 소형화가 급진전되어, 오늘
날과 같은 개인용 컴퓨터에 이르게 되었다.
에니악 시대에 집채만 했던 컴퓨터는 이제 노트북 등의 휴대형 수준을 능
가하여 앞으로 나노(Nano) 기술 등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되면 신용카드 만
한 크기가 될 지도 모른다. 또한 광컴퓨터, 뉴로컴퓨터, 양자컴퓨터 등 온
갖 차세대 컴퓨팅 방식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물건이
곧 컴퓨터가 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유비퀴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이 열게 될 꿈 같은 세상도 기대되고 있다.
현재와 미래의 정보기술혁명, 이는 디지털 스타 에니악으로부터 비롯되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 성우 : 과학평론가이며, 저서로는 '과학사 X파일', '상상은 미래를 부른
다' 등이 있다.


- 삼성웹진 DIGITALL 2003년 7월호 'Vacuum' (Digital St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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