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과 그레이가 만약 한국 특허청에 전화발명 특허를 냈다면?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5-06-0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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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전화기를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한 벨(왼쪽)과 그레이

아래 : 벨의 전화 관련 연구 과정이 기록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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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법(6)


벨과 그레이가 만약 한국 특허청에 전화발명 특허를 냈다면?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전화기의 최초 발명 및 특허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벨(Alexander Graham Bell:1847~1922)과 그레이(Elisha Gray:1835~1901)의 사례를 떠올릴 것이다. 즉 두 발명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전화기를 최초로 발명하여 미국 특허청에 경쟁적으로 특허를 출원하였으나, 벨이 그레이보다 한두 시간 빨리 특허를 신청하였기 때문에 정식 특허권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꽤 오래 전 ‘1등주의’를 강조하며 그레이와 같은 ‘안타까운 2등’의 덧없음을 부각시키는 모 기업의 이미지 광고에도 인용된 적이 있듯이, 이는 마치 극적인 차이로 나중에 운명이 크게 엇갈렸던 대표적인 사례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벨이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도 아닐 뿐더러, 그레이가 전화기의 특허권 획득 및 이후 사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것은 특허 신청이 재빠르지 못해서가 전혀 아니다. 필자 역시 이에 관해 예전에 낸 책과 다른 글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특허제도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 보고자 한다.

만약 한두 시간 차이의 특허 출원으로 특허권이 엇갈렸다고 본다면, 많은 지적재산권 전문가나 관련 법률가들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벨과 그레이가 전화기를 각각 발명하여 우리나라의 특허청에 벨이 그레이보다 한두 시간 빨리 특허를 출원한다고 가정한다면, 누가 특허를 받을 수 있을까?

독자 여러분과 함께 퀴즈(?)를 풀기 위해 객관식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벨이 단독으로 특허를 얻을 수 있다.
2) 벨과 그레이가 공동으로 특허를 얻을 수 있다.
3) 둘 다 특허를 받을 수 없다.
4) 알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의 특허 제도는 미국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를 든 것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정답부터 확인해 보고 계속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답은 ‘4) 알 수 없다’이다. 우리나라의 특허법 제36조에는 동일한 발명이 두 개 이상 특허 출원이 된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① 동일한 발명에 대하여 다른 날에 2 이상의 특허출원이 있는 때에는 먼저 특허출원한 자만이 그 발명에 대하여 특허를 받을 수 있다.
② 동일한 발명에 대하여 같은 날에 2 이상의 특허출원이 있는 때에는 특허출원인의 협의에 의하여 정하여진 하나의 특허출원인만이 그 발명에 대하여 특허를 받을 수 있다. 협의가 성립하지 아니하거나 협의를 할 수 없는 때에는 어느 특허출원인도 그 발명에 대하여 특허를 받을 수 없다.

즉 동일한 발명이 특허 출원을 다툴 경우, 우리나라의 특허법은 발명의 선후에 관계없이 누가 먼저 특허를 출원했는가를 중시하며, 이를 ‘선출원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위의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특허가 출원된 날짜까지만 선후를 판정하며, 실제의 출원 ‘시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즉 벨과 그레이가 같은 날 같은 발명을 출원했다면, 서로 협의를 하여 공동으로 출원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특허를 출원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중에 이익을 나눈다든지 하는 식으로 타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협의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타깝게도 둘 다 특허를 받을 수 없다. 이처럼 여러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므로, 위의 퀴즈에 대한 정답은 '알 수 없다'가 된다.

그러면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미국에서는 출원 시점의 선후에 따라 특허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먼저 발명을 완성하였는가를 중시하여 판정한다. 이를 ‘선발명주의’라고 하는데, 미국은 특허제도로서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발명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벨이 그 당시에 미국에서 특허권을 정식으로 획득한 것은 그레이보다 앞서서 전화기 발명을 완성했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지, 한두 시간 먼저 특허를 신청했다고 해서 된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물론 발명을 누가 먼저 완성했는가를 판단하는 문제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특허청에서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를 고려한다. 즉 발명을 착상(Conception)하는 것, 그 후에 이를 구체화하여 구현하는 실시화(Reduction to practice) 과정, 그리고 착상과 실시화에서 열심히 한 정도(Diligence)가 그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동일 발명을 다투는 경우, 어느 한 쪽이 착상과 실시화 모두 앞섰다면 물론 그 사람이 먼저 발명을 완성한 것이 되어 특허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착상과 실시화에서 선후가 각각 달라진다면, 열심히 한 정도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특허 부여를 판단하게 된다.

벨과 그레이의 경우, 벨은 전화기 발명의 착상과 실시화 뿐 아니라 이후 대중적인 보급을 위한 실용화 및 사업화 과정에서도 대단히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레이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그다지 기대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레이를 후원하던 당시의 거대 통신회사 웨스턴 유니언 사 역시 전화기를 ‘흥미 있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고 실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화라는 것은 통신수단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 기구는 우리에게 별로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한 당시 웨스턴 유니언 고위층의 견해는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따라서 어느 면에서 보나 벨이 그레이를 제치고 특허를 얻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벨은 자신의 전화기 발명에 관한 특허권을 지키기 위하여, 무려 600번 이상 법정에서 자신의 특허를 방어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한두 시간 차이로 특허권이 엇갈렸다.’는 일반의 통념은, 선출원주의의 관점에서 보나 선발명주의의 관점에서 보나 다 맞지 않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특허는 누구의 것인가’하는 문제는 이와는 별도로 다른 요소들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 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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