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전통 과학기술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9-01-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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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의 전통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역시 예전에 비해 부쩍 늘어난 듯하다. TV의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역사물 등에서도 이에 대해 조명하거나 내용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기도 하고, 작년에는 이를 주된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된 바 있다.
우리의 전통 과학기술이 미래의 과학기술상과 직접 연관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을지 몰라도, 과거 우리 선조들이 몇몇 분야에서나마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뛰어난 과학기술 수준을 지녀왔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면서, 영화 속에 나타낸 우리의 전통 과학기술이나 관련 의학 등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하다.

근래에 범죄 및 첨단과학기술에 의한 증거 수집과 추리 과정 등을 다룬 CSI(Crime Scene Investigation)라는 외화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끈 바 있는데, 우리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이와 비슷한 성격의 과학수사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시리즈가 공중파와 케이블 TV 등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으며 상영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시대판 CSI라 할 수 있는 과학수사대가 바로 ‘별순검’인데, 원래 황궁숙위 및 경찰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순검이라 하고, 그 중 제복을 입지 않고 비밀정탐에 종사하는 자라 별순검이라 불렀다. 즉 별순검은 정보 임무 등을 맡은 오늘날의 사복형사와 비슷한 직분인 셈이다.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 및 후속 시즌 시리즈는 조선시대 말기와 대한제국 선포 이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므로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시기인 셈인데, 그동안 개봉된 몇 편의 영화들은 이보다 앞선 시기의 법의학 지식 및 과학적 추리 과정 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가 이인화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은 정조시대 왕권과 신권의 대립 과정 등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주인공 이인몽(조재원 분)과 정약용(김명곤 분)이 사건의 배후와 비밀 등을 파헤쳐 가며 영화가 진행된다. 특히 영화에서 형조참의 직분으로 나오는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답게 박학다식하고 과학적 추리에 능한 인물로서, 정조의 명으로 선대왕의 서책을 정리하던 와중에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궁궐 당직자의 사인이 석탄에 의한 질식사였음을 밝혀낸다.

김미정 감독, 박진희 주연의 영화 ‘궁녀(2007)’는 조선시대 숙종 시절을 배경으로 궁궐 안 후궁과 궁녀들의 애환과 욕망 등을 다룬 미스터리 공포, 스릴러물이다. 장희빈이 낳은 세자 균(훗날의 경종)의 출생을 둘러싼 야사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어느 궁녀의 의문스런 죽음을 둘러싼 비밀과 관련 사건 등을 다루고 있으나 영화 종반에 지나치게 초자연적인 방향으로 흐른 것이 거슬리기도 한다. 그러나 궁녀의 사인 규명 등의 과정에서 상당부분 과학적 추리와 관련 법의학 지식 등도 소개되는데, 이 영화에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아가는 수사관의 역할을 맡은 이는 주인공인 내의녀 천령(박진희 분)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영화 중에서, 과학적 추리 과정 등이 가장 돋보이는 영화는 김대승 감독, 차승원 주연의 ‘혈의누(2005)’이다.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초 제지업이 번성한 가상의 외딴 섬 동화도를 배경으로 제지 수송선 화재와 참혹한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과학수사관의 역할을 맡은 이는 화재 사건 수사를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 원규(차승원 분)이다.
그는 명탐정 셜록 홈즈만큼이나 뛰어난 추리력와 냉철한 과학수사 기법을 동원하여 연쇄살인의 전모를 밝히려 애쓴다. 이는 참혹한 살인을 천주교도 역모 일당으로 낙인찍혀 온 가족이 참형을 당했던 강객주 원혼의 저주로 여기면서 공포에 떠는 주민들과 섬의 무당 등 초자연적인 측면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영화 전반을 이끌어간다.

이들 영화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도 나름의 과학기술과 법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한 수사기법들이 활용되었다. 영원한 제국, 궁녀나 여러 드라마 등을 보면 변사당한 사람의 사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은비녀를 시신의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은 후에, 그 색깔의 변화 여부를 보고 독살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독극물인 유황이나 비소 등이 은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검은 막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제대로 판명되지 않을 때에는 시신의 입에 밥 한술을 넣어 두고, 일정 시간이 경과된 후에 꺼낸 그 밥을 닭에게 먹여 보아서 독살 여부를 판단했다고도 한다.

불에 탄 시신이나 물에 빠진 상태에서 발견된 시신의 검시와 사인 판단은 현대 법의학이나 큰 차이가 없다. 즉 불탄 시체의 경우 입과 코 안에서 재나 그을음이 발견되는지 검시하였는데, 화재가 직접적 원인이 되어서 죽었다면 숨을 들이쉴 때에 재 등을 함께 마셨을 것이고, 이미 죽은 후에 시신이 불에 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경우에는 사인이 익사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하여, 입과 코에서 흰 물거품이 발견되는지 여부를 중시하였다. 물에 빠져 죽었다면 급하게 호흡하려다 물을 들이마시게 되므로, 이것이 폐와 기관지의 공기나 점액과 섞여서 기포를 형성할 것이고, 이미 죽은 후에 물에 던져졌다면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검시 방법으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신의 상태와 주위의 정황 등을 상세하게 살피는 것인데, 특히 시신의 색깔을 중시하였다. 죽음의 원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목이 졸려 죽은 시신이라면 정맥만 막히면서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서 얼굴이 검붉은 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살해범들이 사인을 위장하기 위하여 상처의 흔적과 색깔을 지우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므로, 상흔이나 사인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감초즙으로 시신의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였다. 만약 범인들이 다른 색소를 식초에 담가서 바르는 방법 등으로 위장하려 했다면, 산과 알칼리의 중화반응으로 인하여 본래의 상흔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신의 과학수사기법에서 혈흔을 감식하는 데에 자주 활용되는 루미놀 반응, 즉 루미놀에 과산화수소수와 헤민 또는 혈액을 더하였을 때 루미놀이 파란 형광을 내는 반응을 통하여 감춰진 혈흔을 찾는 방식에는 못 미칠지도 모르지만, 옛날에도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상당한 과학기술 지식을 나름대로 수사에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였으므로,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해부하는 방식의 부검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고, 잘못 알려진 과학지식들도 더러 있었다. 몇 년 전 TV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소설 동의보감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등을 보면, 허준이 스승인 유의태의 유언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그의 시신을 해부해 봄으로써 훗날 명의가 될 수 있는 길을 닦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드라마적 허구일 뿐 그 시대에 시신 해부를, 그것도 존경하던 스승의 시신에 칼을 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또한 장희빈 등 궁녀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궁궐에 입궁하려는 어린 여자의 손목에 앵무새의 피를 묻혀 봄으로써 처녀 여부를 감별하는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물론 오늘날의 과학으로 본다면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라 할 것이며, 그밖에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결정한 친자확인방법 등도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 중에서도 세종 시기는 우리 역사상 전통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TV 드라마 ‘대왕 세종’ 등에서도 세종 시기의 과학적 업적 여러 가지가 소개된 바 있지만, 측우기,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 간의(簡儀) 등의 각종 천문관측기기 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칠정산(七政算)은 당시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자체의 역법에 바탕한 대단히 우수한 달력이었고, 이천, 장영실, 이순지는 각각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 공학기술자, 천문학자로 꼽힌다.
TV 드라마를 보면 명나라와 세종 간의 천문·역법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 등이 일어나면서, 이 과정에서 장영실이 희생양이 되면서 파직 당하고 낙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역사 기록에는 세종을 위해 만든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천민 출신으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던 벼슬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고만 나오는데, 당시의 시대적 정황 등을 살펴보면 명나라의 견제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와도 관련이 있는 영화로서, 작년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던 ‘신기전(神機箭; 2008)이 있다. 김유진 감독, 정재영, 한은정 등이 주연한 이 영화는 세종 시기에 만들어진 로켓 무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대국인 명나라의 횡포에 신음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던 세종이, 명나라의 '무기사찰'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가공할 위력을 지닌 신형 로켓추진 무기를 개발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경계, 민족주의적 감수성 등에 대해 관람객들 간에 논란이 일기도 하였으나, 전통 과학기술을 다룬 영화로서 꼼꼼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여 상당히 잘 만들어진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화에도 자문을 한 로켓전문가 채연석 전 항공우주원장이 옛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하는 데에 오래 전에 성공한 바 있고, 신기전은 설계도가 남아 있어서 복원이 가능하게 된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로서 국제적인 공인도 받은 바 있다.
다만 신기전이 로켓으로서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화약을 발명한 중국이 역시 로켓도 처음으로 개발한 바 있다. 금나라의 로켓무기인 비화창이 13세기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도리어 로켓을 알게 된 몽골군이 이후 여러 나라와의 침략전쟁에서 로켓무기를 활용함으로써 서양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신기전은 고려 말기 최무선이 제조한 로켓형 화기인 주화(走火)를 개량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영화에 소개된 것처럼 대, 중, 소 신기전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화차가 제작된 이후로는 화차의 신기전기(神機箭機)에 중, 소 신기전 100개를 꼽고 발사각도를 조절한 후 점화선에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발씩 차례로 100발이 발사되었다고 병기도설에 전한다.
화차를 발명한 이는 바로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인데, 병약해서 제위 후 얼마 못가 병사한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오랫동안 세종을 보필해서 나름의 업적을 쌓았고, 측우기 역시 문종의 발명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영화 신기전에서도 노쇠한 세종과 달리 세자인 문종이 상당한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데,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신기전이 의주성의 국경지대 전투 등 실전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위력을 지닌 대량살상무기였던 것은 아니고, 이보다는 총통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기로서 더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영화 신기전이 오래 전의 초베스트셀러 소설로서 영화로도 선보였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조선시대 판인 듯 비치면서 다소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을 듯하다.


최 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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