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수학과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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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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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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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이공계 분야의 기초적 학문이자, 온갖 첨단 과학기술의 ‘언어’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론 입자물리학과 같은 기초과학이든, 각종 공학이나 응용기술 분야이든, 수학의 도움이 없다면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은 여전히 상당수 대중들에게 어렵고 까다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영화 쪽을 보더라도, 수학 자체를 주제로 하거나 수학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제법 있지만, 그중 흥행에 성공하거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수학자들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오는 등 기이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수학자들처럼 성격이 독특하거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수학자들도 적지는 않다. 영화에 나오는 수학이나 수학자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수학을 주제로 하는 영화 중에 대중들이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난해한 영화들이 적지 않은데, 원주율을 의미하는 ‘파이(Pi; 1998)'라는 제목의 영화도 그렇다. 2002년에 개봉된 바 있는데, 주식시장 시스템의 산술 유형을 연구하는 천재 수학자 및 그가 파헤치는 숫자의 비밀에 관한 영화이다.
수학자 맥스는 혼란과 질서가 공존하는 주식 시장을 연구하다가, 시장 독점을 꾀하는 어느 기업과 고대 경전을 해독하려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종파에게 쫓기게 된다. 그는 약물에 의존해가면서 수를 연구하는데, 216개의 미스터리한 숫자와 관련해서 방황과 혼돈을 겪으며 암호를 파헤치다가 엄청난 비밀을 밝혀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데뷔작인데, 초저예산 영화로서 나름의 흥행 실적을 올리고 여러 영화제의 감독상 등 수상한 작품이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대목이 너무 많은 듯하다.

수학과 관련된 퍼즐 풀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스릴러, 공포 영화로서 ‘큐브(Cube 1997)’와 ‘페르마의 밀실(La Habitacion De Fermat; 2007)’이 있다. 두 영화 다 영문도 모른 채 미지의 공간이나 밀실에 갇히게 된 사람들이, 주어지는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거나 미로의 비밀을 밝혀내야만 탈출하거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큐브’는 역시 신예 감독 빈센조 나탈리의 저예산 영화로서 니콜 드 보아, 닉키 과다그니 등이 주연으로 나온다. 경찰, 젊은 수학도, 자폐증 환자, 여의사, 절도 전과자,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내 등 여섯 명이 이유도 모른 체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감옥과 같은 정육면체의 폐쇄 공간에 갇히게 되는데, 이 공간은 색깔 맞추기 퍼즐처럼 똑같이 생긴 정육면체 방들과 복잡한 미로로 구성되어 있어서 탈출하기가 매우 힘들다.
수학문제만큼이나 난해한 정육면체 감옥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퍼즐을 풀면 탈출하여 살아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부비 트랩에 걸려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페르마의 밀실’은 루이스 피에드라이타, 로드리고 소페나 감독에 루이스 호마르, 알레조 사우라스, 엘레나 발레스터로스, 샌티 밀란이 출연한 스페인 영화이다. 이 영화 역시 짧은 시간 내에 수학문제를 풀지 못할 경우 사방이 조여 오는 밀실에 압사 당한다는 점에서 큐브와 비슷한 점이 많은 고도의 두뇌 게임 스릴러 영화이다.
페르마라는 별명을 지닌 낯선 사람에게 네 명이 초대되었는데, 이들은 1분 이내에 주어진 문제를 풀지 못하면 부비트랩과 같은 밀실에 압사 당하게 되므로,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 내에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영화 큐브에서는 주요 캐릭터의 이름을 감옥에서 따온 반면, 페르마의 밀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역사상 위대한 수학자의 이름과 같다.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수학 퍼즐 문제들이, 파스칼, 힐베르트 등 저명(?) 수학자들이 풀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제목을 따온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는 17세기 프랑스의 아마추어 수학자로서, 20세기말까지도 수학계의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던 의문의 정리(定里), 이른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남겼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300년 이상의 세월동안 수많은 쟁쟁한 수학자들이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려고 무척 애썼으나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1907년에는 독일의 볼프스켈(Paul Wolfskehl)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의 풀이에 거액의 상금까지 내걸은 적도 있다. 1994년,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수학자 앤드류 와일스(Andrew Wiles)가 온갖 현대 수학이론을 동원하여 마침내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여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다.

수학을 주제로 한 위 세편이 영화들이 본격적인 흥행을 기대하고 제작되었다기보다는, 모두 저예산 영화로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정도라면, 수학자를 주제로 한 영화들 중에는 흥행에도 성공하고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들도 있다.
론 하워드 감독의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 2001)’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로서, 러셀 크로우가 주연을 맡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Forbes Nash Jr.; 1928~)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내성적인 성격의 천재 존 내쉬는 늘 수학문제에 매달려 사는데, 그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들른 술집에서 금발 미녀를 둘러싸고 벌이는 친구들의 경쟁을 지켜보던 중 수학 이론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내쉬가 직관으로 밝혀낸 것이 바로 게임이론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이론으로서, 그를 일약 학계의 스타로 떠오르게 하고 훗날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을 수 있게 한 탁월한 업적이다.
이후 MIT 대학의 교수로 수학을 강의하던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던 물리학과 대학원생 알리샤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결혼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정신분열증으로 파멸의 늪에 빠져가고 있었다. 즉 그는 정부의 비밀요원 윌리암 파처를 만나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고, 소련의 스파이가 자신을 미행하여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아내에게까지 비밀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내 알리샤의 헌신적인 사랑과 그의 초인적인 의지로 결국 정신병을 극복하고 1994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된다.
다만 영화가 실제와 약간 다른 점도 꽤 있는데, 존 내쉬는 구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가 아닌, 외계의 암호를 찾기 위하여 신문과 라디오에 매달렸다고 한다. 또한 아내 알리샤가 영화에서처럼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것은 아니고, 1963년에 한때 이혼을 했다가 그의 간청으로 몇 년 후 되돌아왔다고 한다.
존 내쉬의 대표적 업적인 내시 균형 이론은 게임 이론에 있어서, 경쟁자의 대응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하고 나면 서로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는 균형 상태를 의미한다. 즉 상대방이 현재의 전략을 유지하게 되면 자신도 지금의 전략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는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등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이론은 수학과 경제학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세계의 정치, 군사, 경제 전략이나 무역 협상, 노동관계, 생물진화 이론 등에서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원용되고 있다.

비범하지만 괴짜 인생을 사는 수학자를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영화로서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이 있다. 천재적인 두뇌와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성장 환경 탓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사는 청년이, 자신을 이해해주는 참다운 스승을 만나서 인생이 변모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감동적이고 훈훈하게 그린 영화로서, 구스 반 산트 감독에 로빈 윌리엄스와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았다.
보스턴의 빈민가에 사는 청년인 윌 헌팅은 명문 대학인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지만, 교수들도 쩔쩔매는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릴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램보 교수가 반항적인 윌 헌팅을 세상의 밝은 곳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지만 이 천재 청년은 어둡고 불우한 과거로 인하여 방황하고, 램보의 친구인 심리학과 숀 교수가 윌 헌팅을 상담하면서 밀고 당기는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숀은 윌 헌팅의 내면적 아픔에 애정을 지니고 지켜보면서, 그에게 인생을 위한 현명한 태도와 지혜를 가르쳐 주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역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수학자를 그린 휴먼 드라마 작품으로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博士の愛した數式, The Professor And His Beloved Equation; 2005)’이 있는데, 코이즈미 타카시 감독에 테라오 아키라, 후카츠 에리 주연의 일본 영화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숫자를 통해 풀이하는 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80분밖에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수학 박사가, 그가 10번째로 채용한 싱글맘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얘기가 전개되는데, 수식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인생을 매우 아름답게 그린 감동적인 영화이다.
이밖에도 수학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미국에서 2005년에 TV 시리즈로 나와 지금도 시즌을 바꿔서 계속되고 있는 ‘넘버스(Numb3rs; 2005)’가 있다. 약간 코믹한 범죄 수사 드라마인데, 잘 풀리지 않는 어려운 사건들을 수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유추하여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이다.
또한 존 매든 감독에 기네스 팰트로우,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프루프(proof; 2005)’라는 영화도 수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것인데, 데이비드 아우번의 퓰리처 수상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영화 역시 정신병이 있었던 천재 수학자의 딸이, 아버지가 죽은 후 그의 제자와 함께 아버지의 업적을 증명하게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영화에서처럼 괴짜였거나 극적인 인생을 살다 간 수학자들이 물론 적지 않다. 20세기 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던 헝가리의 수학자 폴 에르되시(Paul Erdős; 1913년~1996년)는, 각성제 암페타민을 다량 복용하면서 하루에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오래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의 천재성을 비유하면서 언급된 라마누잔(S. Ramanujan; 1887~1920)은 인도의 채식주의자 천재 수학자로서,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직관과 독창적인 방법으로 숱한 업적을 남겨서 지금도 인도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들이 수학자를 그저 괴짜로만 묘사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스럽지 않으며, 수학이나 수학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지속시킬 우려도 있을 듯하다.

최 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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