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2)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15-02-1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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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물리학자들 중에서 이론과 실험 양쪽에 모두 탁월했던 인물 중 하나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를 꼽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아시모프 박사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페르미를 이론, 실험에 두루 능했던 양수겸장의 대표적 물리학자로 예를 든 바 있다. 페르미는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물리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서, 만약 역대 물리학자들을 통틀어서 랭킹을 매긴다면 최소 10위 내에 들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 최고의 과학자가 아닐까 싶다.

그의 업적은 매우 많지만, 물리학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나오는 이른바 ‘페르미-디랙 통계(Fermi-Dirac statistics)’라는 것이 있다. 기존의 통계물리학에 양자역학의 이론을 새로 적용한 것으로서, 이러한 양자통계는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통계를 따르는 입자를 페르미의 이름을 따서 ‘페르미온(Fermion)’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현대 물리학에서는 보편화된 이론이다.

페르미는 또한 원자핵 물리학에서도 여러 실험을 통하여 숱한 업적을 쌓았는데, 특히 여러 원소의 핵에 인공적으로 중성자를 충돌시켜서 핵변환 등을 일으키는 ‘중성자 사격실험’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하여 수많은 인공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핵분열 연구의 단초를 제시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원자력 에너지 시대의 길을 열었다 하겠다. 그는 중성자에 의한 인공방사능의 연구 업적 등으로 1938년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는데, 당시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의 압박을 피해서 노벨상 수상을 위하여 출국했다가 이탈리아로 귀국하지 않고 곧 바로 미국으로 극적인 망명의 길을 택하여 이후에는 미국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였다.

페르미가 이론과 실험에 모두 뛰어나서 양쪽 방면에서 두루 업적을 남겼던 것은 물론 그의 개인적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배경으로서 그가 주로 연구한 원자핵 물리학의 발전과정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1896년 퀴리 부부의 방사능 발견을 계기로 하여 태동한 원자핵 물리학은 이후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의 전자 발견,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에 의한 원자핵의 존재 입증 등을 거치면서 이후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이른바 20세기 초반의 물리학 혁명을 이끌게 되었다. 당시 이 분야에서 노벨물리학상, 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도 매우 많은데, 물질의 미시구조와 상호작용 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론과 실험이 아울러 중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당시의 원자핵 물리학 분야였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업적을 냈던 과학자들은 당연히 이론과 실험 양 측면에서의 능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이 분야에서 실험적인 업적은 뛰어났지만 이론 정립을 잘못하여 아까운 기회를 놓쳐버린 과학자들도 있는데, 바로 마리 퀴리의 큰 딸인 이렌 퀴리와 졸리오 부부이다. 흔히 퀴리부인이라 불리는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로서 온갖 역경을 뚫고 학문에 매진한 끝에 과학 분야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는 등, 그의 탁월했던 업적과 감동적인 일대기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여성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런데 그의 큰 딸인 이렌 퀴리(Irène Joliot-Curie; 1897-1956) 또한 어머니 못지않은 뛰어난 과학자로서, 남편인 프레더릭 졸리오(Jean Frédéric Joliot-Curie; 1900-1958)와 함께 ‘2세 퀴리 부부’로서 많은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들이 수행한 중요한 연구 중에서 ‘중성자를 발견할 뻔한’ 적이 있었다. 즉 방사성 물질 등에 관한 실험을 수행하던 중에 특정 원소의 원자핵으로부터 나오는 미지의 선(線)을 발견하였으나, 그것이 중성자인 줄을 모르고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잘못된 이론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후 같은 실험을 반복했던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이라는 과학자는 그 선이 전자기파가 아니라 양성자와 질량은 거의 같으나 전기적으로는 중성인 입자라는 이론을 세웠고, 이후 중성자 발견의 명예를 차지한 채드윅은 이 공로로 1935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양 쪽의 성(姓)을 함께 써서 졸리오-퀴리 부부라 불리던 이들은, 이후에도 남들보다 훨씬 앞선 실험적 결과를 얻고서도 이론을 잘못 세워서 역사에 남을 만한 획기적 공로를 다른 과학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 번 더 반복하였다. 즉 핵분열 원리의 발견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페르미는 중성자 사격실험을 통하여 여러 핵변환과 인공 방사성 물질들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어떤 원소의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대부분 원자번호가 하나 더 높은 원소로 핵변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로서는 원자번호 92로서 원소주기율표상 맨 끝자리에 있었던, 즉 가장 원자번호가 높았던 우라늄(U)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수많은 과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 과학자들은 원자번호가 더 높은 새로운 초우라늄 원소가 생길 거라 생각했던데, 페르미 역시 한때 초우라늄 원소를 생성했다고 판단을 한 바 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이 실험에 더욱 매진한 결과,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후 이것을 원자번호 57인 란탄(La)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초우라늄 원소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 독일의 오토 한(Otto Hahn), 마이트너(Lise Meitner),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에 의해, 실험 결과 초우라늄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바륨(Ba; 원자번호 56)과 크립톤(Kr; 원자번호 36)으로 핵분열이 일어난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핵분열을 통해 방출된 중성자가 다른 핵을 때리면서 연속적으로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서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 우라늄 연쇄반응의 원리도 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원자력 발전 등 원자력 에너지의 원천이며, 물론 원자폭탄의 원리이기도 하다. 오토 한은 이 공로로 1944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졸리오-퀴리 부부는 실험 결과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이론적 규명이 늦어지면서 다시 한 번 쓴 잔을 들이킨 셈이 되었다.

졸리오-퀴리 부부도 인공 방사능에 대한 연구 등으로 1935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바 있으므로, 이들을 “실험에 비해 이론에 서툴렀던 과학자”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이론적 구성을 잘못해서 과학적 대 발견을 두 차례나 아깝게 놓쳐버린 사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들이 올바른 이론을 세웠더라면 그들의 어머니인 퀴리 부인보다 더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 by 최성우 -


이미지 위: 퀴리부인의 큰딸과 사위인 이렌과 프레더릭 졸리오-퀴리 부부

이미지 아래: 이론과 실험에 두루 능했던 물리학자 페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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