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물리학상 톺아보기(5) - IT혁명와 융합의 시대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15-09-0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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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노벨 물리학상 톺아보기’를 통해서, 노벨 물리학상은 공학적인 발명이나 기술적 성취가 아닌 물리학이라는 기초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된다는 사실, 따라서 발명왕 에디슨조차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무선전신의 발명자 마르코니는 예외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트랜지스터와 레이저 등은 공학기술 분야에서도 물론 획기적인 업적이었지만, 물리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노벨 물리학상은 예전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 경향과는 약간 다른 흐름도 감지되는 듯하다. 즉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에 따라, 과거처럼 기초과학과 응용공학, 기술 등을 무 자르듯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서로 영역이 겹치는 경우도 잦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21세기 이후 정보통신(IT)혁명과 융합이라는 시대적 변화와 새로운 조류를 노벨과학상 역시 외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첫 사례가 바로 2000년도 노벨 물리학상이다. 21세기 첫 노벨 물리학상은 독일 출신의 헤르베르트 크뢰머(Herbert Kroemer), 러시아의 조레스 알표로프(Zhores I. Alferov), 그리고 미국의 잭 킬비(Jack S. Kilby)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고속 트랜지스터와 레이저 다이오드, 집적회로(IC) 등을 개발하여 현대 정보통신기술의 토대를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끄는 인물이 바로 집적회로의 창시자 잭 킬비(Jack S. Kilby; 1923-2005)이다. 미국 미주리주 태생의 그는 일리노이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대학원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58년에 세계적인 전자회사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에 입사한 후, 이듬해에 반도체 공정을 이용하여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저항 등의 여러 회로 소자를 한 개의 기판 위에 일체화시켜서 제작하는 집적회로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전자회로와 부품들의 소형경량화, 대량생산화가 가능해짐에 따라, 개인용 컴퓨터를 비롯하여 마이콤을 내장한 각종 전기전자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의 마이크로 전자공학의 시대를 연 것이다.
물론 킬비가 처음에 개발한 방식은 1개의 게르마늄(Ge) 칩 위에 집적시킨 트랜지스터와 축전기, 저항 등의 부품들을 미세한 금선으로 수작업을 통하여 일일이 연결시키는 식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집적회로의 개념을 특허로 출원하여 등록을 받았다. 이른바 ‘킬비특허’라 이 특허는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것을 개발한 다른 기업과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반도체IC 기술의 원천특허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특허 보유 기업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에도 막대한 이익을 안겨왔다.
지난 1986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는 킬비의 특허들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과 한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들에게 특허침해소송 등을 제기하는 반도체 특허전쟁이 벌어진 바 있다. 이로 인하여 NEC, 도시바, 히타치, 삼성전자 등 유명 대기업들이 한바탕 커다란 홍역을 치르고 거액의 로열티(특허기술료)를 배상해야만 하였다. 오늘날에는 기존의 IC보다 훨씬 집적도가 높은 LSI(Large Scale Integration; 대규모 집적회로) 및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초고밀도 집적회로) 등을 거치면서, 손톱만한 크기의 칩 하나에 수십만 개 혹은 백만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넣은 메모리 소자들도 흔하지만, 역시 킬비의 발명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 발전한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킬비의 집적회로 발명은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보자면 사실 엄밀히 말해서 물리학적인 업적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트랜지스터와 여러 부품들을 더 작게, 값싸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과 공정을 개발한 것이지,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를 발견하거나 직접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킬비는 전기공학 석사 출신으로서, 물리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물리학 연구를 한 경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비는 2000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물리학이라는 기초학문에의 직접적 공헌 여부를 떠나서, 마이크로 전자공학을 비롯한 각종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크뢰머와 알표로프는 ‘반도체 고속 광전자 이소중합전달체’의 개발 공로, 즉 고속의 갈륨비소(GaAs) 반도체를 개발한 업적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는 휴대전화와 위성통신, 그리고 레이저 다이오드 등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하였으므로 기술적으로도 커다란 업적이지만, 실리콘이 주종을 이루었던 기존의 반도체가 아닌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한 것이므로 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공동으로 연구를 이를 개발한 크뢰머와 알표로프는 둘 다 박사학위를 지닌 물리학자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와 매우 비슷한 경우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지난 2009년에도 나온 바 있다. 그해 노벨 물리학상은 광섬유 및 전하결합소자(CCD) 개발에 기여한 연구자들이 역시 ‘정보통신 세계의 기초를 세운 공로’로 수상하였다. CCD(Charge Coupled Device; 전하결합소자)를 발명한 두 명의 물리학자 윌러드 보일(Willard Sterling Boyle)과 조지 스미스(George Elwood Smith), 그리고 광섬유를 개발한 전기공학자 찰스 가오(Charles Kun Kao)박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아, 마치 2000년도 노벨 물리학상의 데자뷰 같은 느낌을 주었다. CCD란 광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어줄 수 있는 소자로서,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업적인 광전효과(光電效果)를 이용한 것이다. 즉 CCD는 빛이 물질에 닿았을 때 전자를 방출하는 현상을 활용하여 빛을 전기신호로 전환하여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 냄으로써,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내시경, 감시카메라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윌러드 보일과 조지 스미스는 물리학 전공자들로서, 벨(Bell) 연구소 재직 시에 공동으로 CCD를 발명하였다.
2009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찰스 가오 박사는 중국 상하이 태생의 공학기술자로서, 영국에서 전기공학 학사 및 박사학위를 받은 후 광섬유 기술에 대해 연구하였다. 광섬유(Optical fiber)란 빛을 유리섬유 등에 담아서 멀리 보낼 수 있는 광통신의 핵심적 요소인데, 기존의 기술로는 고작 20m 정도밖에 전송할 수 없었으므로 실용화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가오 박사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빛을 100km 이상 전달할 수 있는 광섬유를 만들어냈고, 이 덕분에 온갖 정보를 빛의 속도로 전달하는 광통신이 가능해진 것이다. 즉 오늘날의 유무선 전화망 및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등은 모두 그의 발명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것으로서, 찰스 가오는 ‘광섬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가오 박사의 발명 역시 기초학문인 물리학적 의미의 업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빛의 전반사를 이용한 광통신의 원리는 물리학, 광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알려진 것이며, 또한 광섬유 자체를 가오 박사가 세계 최초로 발명해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실용화 가능한 광섬유를 개발했기에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혁명을 가능하게 한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요컨대, 발명왕 에디슨조차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였듯이, 과거라면 잭 킬비나 찰스 가오와 같은 획기적인 기술적, 공학적 업적을 이룩한 이들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IT혁명와 융합과학기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들에게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기회가 온 것이라 하겠다.

By 최성우


이미지1 : 킬비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IC복제품 (출처 : Florian Schäffer)

이미지2 : 광통신에 사용되는 광섬유 (출처: 위키미디어 GNU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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