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의 재발견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17-11-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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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그다지 쓰이지 않지만 과학기술과 인류 문명 발전의 새로운 장을 연 중요한 기술들이 적지 않은데, 증기기관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기전자분야에서 그런 예를 든다면 진공관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IC)에 밀려났지만, 진공관의 등장은 곧 전자공학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공관 발명의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은 바로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다. 즉 이른바 ‘에디슨 효과’라 불리는 열전자 방출 현상인데, 이를 에디슨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에 의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에디슨은 백열전구에서 필라멘트의 증발에 의해 유리구가 까맣게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구 안에 금속판을 삽입하였는데, 이 금속판이 필라멘트에 대해 양전위(陽電位)이면 전류가 흐르고, 음전위이면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방향성을 지니는 전류를 에디슨 효과라고 하는데,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열전자 방출 현상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에디슨 효과를 이용하여 최초로 진공관을 발명한 이는 전자기학에서 ‘왼손법칙’과 ‘오른손법칙’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과학자이자 전기공학자인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 1849-1945)이다. 그는 진공으로 된 유리구 안에 필라멘트와 2개의 금속판 전극을 넣은 진공관을 발명하고 1904년에 특허도 획득하였다. 그가 발명한 진공관은 2개의 전극을 지니고 있어서 2극진공관이라 지칭하는데, 오늘날에는 반도체소자인 다이오드의 역할과 거의 동일하다. 2극진공관 자체를 다이오드 진공관이라 부르기로 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무선전신의 검파 등에 이용되었다. 
 기존의 2극진공관에 또 하나의 극을 추가한 3극진공관은 1906년에 드포레스트(Lee de Forest; 1873-1961)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는 세 번째 전극인 그리드를 필라멘트와 금속판 사이에 배치하여, 그리드의 전압을 변화시킬 경우 그에 비례하여 필라멘트와 금속판 사이의 전류 역시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는 곧 3극진공관의 증폭작용을 의미하는데, 발명자인 드포레스트 자신은 이를 증폭용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전화 사업을 확장시켜 나아가던 미국의 벨 전화회사(AT&T)는 이 특허를 구입하여 전화기의 음성을 증폭시켜서 더욱 먼 거리에서도 통화가 가능토록 하는 증폭관으로 사용하였다. 당시에 ‘오디온(Audion)’이라는 상표명으로 널리 통용된 것이 바로 이 3극진공관이었는데, 오디온은 또한 그 무렵 선보이기 시작한 무선방송 즉 라디오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진공관의 이용은 전화나 라디오와 같은 음성 기기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고,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전자제품, 그리고 이후에는 컴퓨터의 부품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악한 화질에 머물렀던 기존의 기계식 텔레비전을 밀어낸 전자식 텔레비전의 탄생에도 진공관은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넓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전자식 텔레비전의 브라운관, 즉 음극선관인 CRT(Cathode Ray Tube) 자체도 일종의 커다란 진공관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전자식 텔레비전 발명의 선구자인 즈보리킨(Vladimir Kosma Zworykin; 1889-1982)이 1923년에 발명한 아이코노스코프(Iconoscope)는 전자식 텔레비전 촬영용 진공관이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진공관들이 한꺼번에 사용된 것은, 초기의 컴퓨터일 것이다. 아직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컴퓨터로 공인되고 있는 것은 바로 1946년 2월에 공개되었던 것은 에니악(ENIAC)이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클리(John W. Mauchly; 1907-1980)와 에커트(J. Presper Eckert; 1919-1995)가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한 전자계산기 에니악은 무게가 30톤이 나가는 거대한 덩치에 1만 8천개의 진공관을 달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소비전력도 엄청나서, 에니악을 켤 때마다 그 일대의 전등이 모두 희미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에니악에 앞서서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발명한 암호해독용 기계 역시 많은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콜로서스(Colossus)라 불리던 암호해독용 계산기는 약 1,800개의 진공관이 사용되었고, 종이테이프를 통해 1초에 약 5,000자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었다.

 진공관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크기와 소비전력이 훨씬 작은 트랜지스터 등의 반도체 소자가 등장하고, 수많은 소자를 집적하여 부피를 더욱 줄인 집적회로(IC)가 발명되면서 진공관은 급속히 설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마니아들이나 즐겨 찾을법한 고가의 오디오 앰프 이외에는 진공관이 실제로 쓰이는 곳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핵무기 실험 등과 아울러 전자기펄스(EMP) 폭탄의 위험성이 거론되면서 진공관이 다시 한번 부각된 바 있다. 즉 최신형 반도체와 초정밀 집적회로 등으로 만들어진 첨단 전자기기와 이를 채용한 군사무기 체계를 순식간에 무력화할 수 있는 EMP탄이라 할지라도, 구형의 진공관에는 그리 큰 타격을 입히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과 냉전을 벌이던 시절, 소련이 제작한 최신예 미그(MiG) 전투기들은 레이더 등의 중요부품에 대부분 트랜지스터가 아닌 진공관을 채용하고 있었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지도 오래된 무렵이었으므로 그 정확한 이유에 대해 논란이 되었지만, EMP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나 저온 등의 극한적 환경에서 견디는 힘이 진공관이 더 우수했다는 측면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수많은 전자기기의 부품을 진공관으로 대체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진공관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By  최성우

이미지1: 3극진공관을 발명한 드포레스트
이미지2: 오디온(3극진공관)을 장착한 라디오(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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