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판 노아의 방주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19-08-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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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생명체의 멸종은 피하기 어려운 숙명일 수도 있는데, 첫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로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다섯 번의 대멸종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멸종사태를 겪어 왔다. 최근 여러 이유로 인하여 생물들의 멸종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면서 이른바 ‘제6의 대멸종’이 임박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같은 동식물의 급격한 멸종은 지구의 생물다양성 유지에 커다란 위협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종의 대량 멸종은 지구 생태계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지구상 식물의 90% 이상은 씨앗에 의해 번식하는 종자식물인데,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 또는 전쟁 등 각종 재앙에 의해 특정 식물 종자가 사라지는 상황에 대비하는 중요한 시설이 북극 근처에 마련되어 있다. 노르웨이령인 스발바르제도의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섬에 2008년에 설립한 스발바르 국제 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이다.
 이곳은 북극점으로부터 약 1,300km 떨어진 북위 78도의 북극권 영구 동토층에 위치하므로, 식물들의 씨앗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또한 스피츠베르겐섬은 지진, 화산 기타 자연재해의 위험이 상당히 적은 지역이다. 물론 자연상태로도 추운 곳이기는 하지만, 저장고에 냉동시설을 가동하여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약 450만 종의 씨앗을 저장, 보관하고 있다. 세 곳의 지하 저장고에는 최대 1,500만 종의 식물 종자를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국제 종자저장고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여, ‘최후의 날 저장고(Doomsday vault)’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별칭에 걸맞게 강한 지진이나 소행성 충돌, 핵폭발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바위산의 120m 지하에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각종 씨앗은 싹이 트지 않도록 영하 18℃의 상태로 알루미늄 백에 밀폐되어 보관되는데, 전기 공급이 끊기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상당 기간 동안은 자연적으로 냉동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국제 종자저장고에는 해마다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수만 개 이상의 씨앗이 새로 입고되는데, 우리나라 역시 2008년부터 콩, 벼, 보리, 기장 등 각종 재래 식물의 씨앗을 1만 종 이상 보내서 보관하고 있다. 국제연합 산하 세계작물 다양성재단에서 기금을 출연하고, 세계 각국 정부 및 NGO, 비영리재단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운영된다. 저장 비용은 원칙적으로 무상이며, 전쟁이나 각종 재해 등으로 특정 지역의 종자가 없어지는 경우, 국제 종자저장고에 요청하면 종자를 받아올 수 있다. 오랜 내전으로 시리아의 식물 종자들이 위기에 처하자, 몇 년 전 국제 종자저장고에서 수만 개의 씨앗을 시리아로 보내준 적도 있다.   
 저장고 건물은 공공건물의 디자인을 중시하는 노르웨이 정부의 방침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저명 작가가 설계하여, 북극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세련되고 예술성이 높도록 건축되었다. 건물 외관의 광섬유 조명은 2009년 노르웨이 조명상도 받은 바 있다.
 수많은 식물의 종자들이 발아하지 않고 씨앗 상태로 오래 보관될 수 있는 이유는 ‘종자 휴면’ 때문이다. 마치 일부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듯, 식물의 종자는 낮은 온도에서는 안전한 껍질 안에서 씨앗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적당한 온도와 수분, 햇빛 등의 외부 환경이 갖춰졌을 때만 싹을 틔우게 한다. 식물이 종자 휴면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발아 억제 호르몬인 앱시스산(abscisic acid) 때문인데, 이 호르몬의 상세한 작용 매커니즘과 단백질 수송체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저장고에 보관한 모든 씨앗이 수십 또는 수백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연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동안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를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국제 종자저장고에만 지나치게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아울러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최근 국제 종자저장고 자체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급격한 기온 상승으로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2017년에는 지하 저장고 중 한 곳의 입구 터널이 침수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했다. 저장고가 위치한 스발바르제도 일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더워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마저 나오면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의 보고서에 따르면, 스발바르제도는 2100년 안에 평균기온이 10℃까지 상승할 수도 있다고 한다.
 각종 재해로부터 식물의 종자를 지키고자 건설한 국제 종자저장고조차도 인간이 초래한 지구온난화의 폐해를 비켜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저장고 앞에 방수벽을 새로 쌓는 등 침수에 대비하는 공사를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꼭 국제 종자저장고를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인류의 향후 생존을 위해서는 범세계적으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지구온난화의 진행을 최대한 늦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By 최성우

이미지1: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소의 아름다운 외관 (저작권자: Frode Ramone)
이미지2: 국제종자저장소 내 알루미늄백에 저장된 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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