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의 관계는? (1)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20-01-0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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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융합과 통섭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오늘날, 기초과학 연구와 응용기술 연구, 그리고 제품개발 연구의 구분이 예전처럼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경계가 급속히 흐려지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이 하나의 단어처럼 쓰이다 보니, 과학과 기술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응용기술이나 제품개발 연구와는 다소 독자적인 영역으로서 ‘기초과학 연구’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기초과학 연구란 ‘활용 목적이 아닌 자연 현상의 이해 및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국가 연구개발비에서 기초과학 연구의 금액과 비중을 크게 늘려가고 있다. 따라서 기초과학 연구의 성과는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지, 또한 어떠한 매커니즘을 통해서 응용기술이나 제품개발 연구로 이어지는지 등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획기적 기술이나 중요한 발명품들이 ‘기초과학 연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즉 예전에는 기초과학적 지식보다는 기술자나 발명가 개인의 탁월한 장인적 재능과 경험 등이 더욱 중요한 관건이었다. 또한 발전의 순서 역시 기초과학이 먼저 탄생하고 나서 관련 기술이나 제품이 개발되었다기보다는, 도리어 제품이나 기술이 먼저 선보이고 나서 해당 분야의 기초과학이 발전한 경우도 매우 많다.
 산업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증기기관의 탄생은 기초과학과는 거의 무관했던 기술발전의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증기기관의 오랜 원조는 고대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뛰어난 기술자 헤론(Heron)이 만든 증기구(蒸氣球; Aeolipile)라 볼 수도 있겠지만, 실용적으로 쓰인 근대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한 인물들로는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이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증기기관을 개발한 이들은 해당 분야의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초과학이라 할 수 있는 ‘열역학(熱力學; Thermodynamics)’의 도움을 전혀 받은 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열역학 제1, 제2법칙 조차도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열역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증기기관과 같은 열기관을 개량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략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학문으로 볼 수 있다. 열역학의 선구자인 프랑스의 물리학자 카르노(Nicolas Léonard Sadi Carnot; 1796-1832)는 이른바 ‘카르노 사이클(Carnot cycle)’이라 불리는 이상적인 열기관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내용이 담긴 ‘불의 동력 및 그 힘의 발생에 적당한 기계에 관한 고찰(Réflexions sur la puissance motrice du feu et sur les machines propres à développer cette puissance)’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1824년으로서, 증기기관을 널리 상용화시킨 제임스 와트가 이미 사망한 이후이다. 열역학은 이후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 켈빈(Lord Kelvin, William Thomson; 1824-1907) 등에 의해 에너지보존의 원리와 엔트로피 증가 법칙 등이 발견되면서 독자적인 학문으로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비행기의 발명과 관련 기초과학인 유체역학, 항공역학의 관계 역시 증기기관의 경우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물론 비행기가 나오기 훨씬 이전인 18세기 중반에 기본적인 유체역학 공식이라 할 수 있는 베르누이의 정리(Bernoulli's theorem)가 정립되어 비행기 양력 발생의 원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Wright) 형제는 비행의 원리 등에 대한 지식을 나름 쌓기는 했지만, 고졸 정도의 학력에 자전거포 직공이었던 그들이 유체역학을 모두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의 비행기 발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초과학적 배경이 튼튼해서라기보다는, 기계제작 등의 장인적 재능과 경험, 끈질긴 노력 등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서 이론적으로는 라이트 형제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랭글리(Samuel Pierpont Langley; 1834-1906)는 도리어 비행기 제작 및 시험비행에 끝내 실패하고 말아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성공적인 비행을 마친 직후인 1904년부터 독일의 응용물리학자로서 근대 항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틀(Ludwig Prandtl; 1875-1953) 등에 의해 항공역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 또한 물리학이나 재료공학 등에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전구를 비롯한 숱한 발명품들을 완성해낸 것은 전혀 아니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이후에 이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에디슨 효과’라 불리는, 가열된 전구의 전극에서 열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기초과학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그는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훗날 이러한 열전자방출 현상 등을 제대로 설명한 물리학자 오언 리처드슨(Owen Willans Richardson; 1879-1959)은 그 연구업적으로 1928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아무튼 에디슨의 전구 발명이 새로운 기초과학 연구를 견인한 셈이며, 이는 진공관의 발명 등으로 이어져서 전기전자공학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제품 및 기술 개발 과정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초과학 연구는 20세기 초중반부터 큰 변화를 겪으면서 과학기술 발전에서 있어서 새로운 정형을 선보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By 최성우


이미지1: 열역학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카르노 사이클
이미지2: 에디슨효과라 불리는 열전자방출현상 발견의 계기가 된 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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