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수와 물 발자국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22-01-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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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남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한 분쟁은 거의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듯하다. 우리 속담에도 ‘제 논에 물 대기(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지만, 경쟁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라이벌(Rival)’은 바로 개울이나 시내를 뜻하는 라틴어 ‘리부스(Rivus)’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물을 둘러싼 국제적 분쟁이나 관련 문제 등은 여러 나라에 걸쳐 흐르는 긴 강의 물을 먼저 차지하려는 다툼처럼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얼핏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를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가상수(假想水; Virtual Water)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가상수란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특정 농산물이나 제품 등을 생산하는 모든 과정에서 사용하는 물로서, 물 문제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토니 앨런(Tony Allan) 교수가 제안한 개념이다. 가령 1kg의 쌀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약 5,100리터의 물이 소요되고, 돼지고기 1kg을 얻기 위해서는 약 11,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 세계 물 소비량의 92% 정도가 농축산물을 생산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농축산물뿐 아니라 가공식품과 공업제품 등의 생산에도 물론 가상수가 적용된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는 커피콩의 재배로부터 커피의 생산, 출하에 이르기까지 140리터의 물이 소비되고, 햄버거 한 개에 필요한 가상수는 무려 2,400리터나 된다. 미국인 한 사람이 하루에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데에 드는 가상수는 중국인 한 명이 쓰는 양의 3배에 달한다고도 한다.

 최근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유사하게 물 발자국(Water Footprint)이라는 개념도 있다. 물 발자국이란 특정 제품의 생산뿐 아니라 그것을 유통하고 소비자가 사용하고, 다 쓴 후에 폐기하기까지 전체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의 총량과 흐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1kg 생산에 200리터의 가상수가 소비되는 토마토의 운송을 위해 컨테이너선 한 척을 토마토들만으로 가득 채운다면, 그 화물선의 물 발자국은 75억 리터 정도의 가상수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화물용 선박과 비행기에는 위성 추적 장치가 달려 있을 것이므로, 우주 상공에서 이들을 추적한다면 지구상에서 이동하는 전체 가상수와 물 발자국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살펴보면,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가상수의 양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실제로 흐르는 물의 3배나 된다고 한다.
 가상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이지만, 이것이 과도하면 결국은 실제 물을 남용하게 만들어서 국제적인 물 문제나 심각한 환경 문제마저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물이 풍부했던 아랄해가 사막처럼 메마르게 변해버린 환경 재앙을 꼽을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위치한 아랄해는 담수호는 아니지만 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서, 물고기 등이 풍부하여 인근의 주민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옛소련 정부가 주변에 대규모의 개간 사업과 관개 사업을 추진한 결과, 아랄해로 흐르던 강물이 크게 줄어들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는 호수 자체가 급속도로 작아지고 일대는 염분이 많은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다. 호수에서 살던 많은 어류마저 멸종하여 연안어업이 불가능해지자 생계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떠나갔고, 주변 지역은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가 더욱 심해지는 등 기후변화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옛소련 정부가 아랄해로 흐르던 강물을 돌려서 개간 사업을 했던 것은 밀을 더 재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수출용 작물이었던 목화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였다. 저렴하고 질 좋은 옷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들 의류의 생산에 필요한 가상수를 폭증시켜, 결국 먼 나라의 호수를 메마르게 하고 끔찍한 환경 재앙마저 일으킨 것이다.     

 가상수와 물 발자국을 통하여 파악한 결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 간의 물 사용 불균형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물 소비량이 많은 선진국들은 부족한 물을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유럽은 44%, 미국은 20%의 물을 해외로부터 얻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에는 미국조차도 다른 나라에 상당량의 물을 빼주다 보니 일부 대수층의 지하수가 말라가는 등 위기에 처하고 있다.
 세계 최강의 선진국인 미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가상수를 가져가는 나라는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물의 66% 정도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석유 시추뿐 아니라 지하수를 끌어오는 데에도 탁월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대수층이 고갈되자, 기업들이 미국의 애리조나 등에 진출하여 대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면서 그곳 대수층의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애리조나 일대의 지하수가 상당 부분 고갈되어 가고, 어떤 곳에서는 땅이 내려앉고 갈라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By 최성우

이미지1: 대폭 축소되고 주변이 사막화된 아랄해(왼쪽이 1989년 오른쪽이 2008년의 모습) ⓒ NASA
이미지2: 전세계 물발자국에 따른 분야별 가상수 분포도 ⓒ Sampa

  • 빨간거미 ()

    신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경주 주변의 식생파괴와 그로 인한 물 부족 문제라는 주장(논문)이 있더군요.
    논문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역사학자가 아닌 지질학자였는데,
    지하 화분의 성분과 역사적 사료등을 바탕으로 추론하더군요.
    대략 과정은 이렇습니다.

    1) 경주의 인구 증가 & 소작농들의 지(地)력 관리 소홀로 인해 경작지 황폐화
    2) 식량 확보를 위한 농지 개간(숲을 농지화)
    3) 숲으로 인해 토양에 저장되던 수량이 감소

    1)-3)의 과정이 오랜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용수 부족과 가뭄 효과 증대가 발생했다는 것이죠.

  • 댓글의 댓글 최성우 ()

    코멘트 감사합니다...

  • 묵공 ()

    물은 공기와 토양과 더불어서 중요한 자연자원인데, 가상수 개념이 꽤 유용하군요.
    이런 관점에서 탄소발자욱과 같이 물발자욱을 새로운 개념으로 도입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봐야겠습니다. 저희 에너지경제연구원도 이 문제를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 댓글의 댓글 최성우 ()

    관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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