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되기를 거부하고 정글의 지배자가 되라 - 박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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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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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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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기요사키의 천민 자본주의적 재테크 교과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Real estate(부동산)이라는 말의 어원은 스페인어 real(레알=royal) 이다. 왕정시대엔 국가의 모든 재산이 왕의 소유였다. 땅을 사용하더라도, 왕의 것을 잠시 빌려 쓸 뿐이라는 뜻으로, 부동산을 왕의 재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에서 왕정은 몰락하였다. 왕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실권을 가진 왕은 아닌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 국가의 재산은 왕으로부터 자본가로 이전되었다. 시민이 재산을 사유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양권의 나라들에선 그러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럽에서 부가 왕으로부터 자본가들에게로 이양된 이유는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상공인들이 부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와 식민지 국민을 착취하여 부를 직접 만들었는데 기껏 벌어놓은 부가 왕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무척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라는 시스템을 부정해버렸다.

20세기초 러시아에서 이와 비슷한, 그러나 조금 다른 일이 벌어졌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들을 선동했다. “왜 정작 일 하는 것은 우리들인데, 부는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는가? 땅은 농민이 경작하기 전엔 아무 부가가치가 없으며 광산은 광부가 곡괭이질을 하기 전엔, 공장의 기계는 노동자가 붙어서 일하기 전엔 마찬가지로 아무 부를 만들지 못한다. 부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인데, 갖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노동자와 농민은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분개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가라는 시스템을 부정해버렸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무한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크게 팽창하면서, 자연 자원을 가공하여 공산품을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가던 시절에서, 잘 만든 물건만이 팔려나가고 뒤쳐지는 물건은 시장에서 도태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앞선 손기술을 가지고 오랜 전통을 지닌 ‘브랜드’의 가치와, 같은 품질이라면 보기 좋은 것이 잘 팔리는 디자인의 시대가 왔다. 기업들은 불량률을 줄이고, 같은 품질의 제품을 더 싼 가격에 공급하기 위해 경영을 합리화하고, 원가를 절감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비자들은 질 좋은 제품을 싼 가격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자본주의 무한 경쟁에 찬사를 보냈다. 자본가라는 시스템을 부정했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냉전은 종식되었다.

냉전이 끝나고 블록화된 세계는 해체되었다. 코카콜라와 맥도날드는 전 세계 어디에나 파고들었고, WTO가 지배하는 자유 무역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하나의 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역사는 품질의 시대를 지나 하이테크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인텔의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가 전 세계 컴퓨터의 70% 이상을 뒤덮고, 반도체를 만든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삼성전자의 메모리칩이 또한 그러하다. 사우나의 나라 핀란드에서 나무 베던 노키아가 이동통신 붐을 타고 10년만에, 전 세계 모든 휴대전화의 35%를 만들어 팔고 있다. 글리벡과 비아그라는 비슷한 경쟁 제품조차 없다. 자동차 회사들간에 먹고 먹히는 합병이 일어나 한국엔 한국 회사 1개와 외국 회사 2개만 남았고, 미국엔 두 개 반이 남았다. 영국의 재규어와 스웨덴의 볼보는 미국 회사 소유이며 롤스로이스와 로버는 독일 회사 소유이다. 세계 대형 선박의 60%는 한국과 일본에서 건조된다. 직원수 9000명에 불과한 퀄컴은 한국 한 나라에서만 수조원의 기술료를 챙겨갔다.

하이테크 시대의 부가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부는 누구에게 축적되는가? 자연 자원을 가공하는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만드는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에게 부가 돌아가는가? 그렇지 않다. 하이테크 부가가치는 신기술이 만들어낸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이란 손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남들이 아직 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하이테크 시대의 품질이란, 적은 불량률보다는 남보다 나은 성능을 뜻한다. 완벽한 품질의 제품엔 ‘명품’이란 훈장이 수여되지만 하이테크 명품은 곧 역사에만 남고 시장에선 사라진다. 루이 비통 가방이나 에르메스 스카프와는 달리 3년전 모델인 모토롤라 스타택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 완벽한 수율을 자랑하는 펜티엄 133 MHz CPU보다는 5%의 불량품이 버려지는 펜티엄4 2.66 GHz CPU를 생산한다.

부는 1등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독점한다. 하이테크 제품의 가격은 공급자가 지배한다. 시장은 항상 하이테크 제품에 목마르다. 왜냐하면 그 물건을 통해 소비자들 나름대로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일부는 하이테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이 만들어 내어 놓지 못하지만 살 사람은 많은 물건,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최첨단 1등 제품에는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는다. 가락시장의 농산물은 매일 새벽 중매인들의 경매를 통해 가격이 결정되지만 인텔은 딜러들을 불러놓고 CPU 매물을 경매에 부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정한 시장의 룰에 따라, 더욱 고성능 제품이 출시되는 날짜에 맞춰, 정해진 비율로 ‘졸지에 한 물 간’ 제품의 가격을 인하할 뿐이다.

1등 제품을 만드는 기업을 많이 가진 국가는 핼랠래하고 앉아 있어도 저절로 부자가 되고,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가는 기업을 많이 가진 국가는 남 좋은 일만 해주면서 겨우 밥 한술 먹을 정도가 되며, 그조차도 못하는 국가는 피를 뽑아 밥을 먹는 격으로, 경쟁력을 계속 상실하여 3류 국가가 되기 십상이다.

하이테크 시대의 부는 신기술이 만들며, 신기술은 과학기술인이 만든다. 원자재의 가격, 공장의 설비,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력, 영업직 노동자의 세일즈는 부차적인 것이다. 큰 덩어리의 부가가치는 과학기술인이 만든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에서는,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 부가가치를 만들었고, 공장이 지어진 뒤엔 기계를 돌리고 손수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가, 공장 지을 돈을 대는 자본가가 부가가치를 만들었다. 최신 기술 제품만이 살아 남는 시대에는 신기술을 개발하는 과학기술인이 부가가치를 만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학기술인은 부를 생성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한국의 경우가 심할 뿐, 세계 공통적으로 그러하다. 한국의 과학기술자가 선망해 마지않는 미국만 봐도, 최고의 경제적 대우를 누리는 것은 재직중 주가를 높인 CEO이지, 매출을 늘리고 주가를 높이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기술, 신제품을 개발한 과학기술인이 아니다.

18세기 이후 자본가들에 의해 세워지고 200여년간 다져져 온 시스템 속에서 과학기술인의 처우 개선을 목청껏 소리높인들, 봉건 영주 하의 소작농들이 자기네 몫을 더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소작농들은, 정작 일을 해서 곡식을 거두는 것은 자신들이면서도 그저 땅을 빌려주고 부쳐먹게 해 주는 봉건 영주에게 항상 감사했다. 과학기술인들의 삶이 꼭 그렇지 않은가? 연구할 수 있는 실험실과 처자식 먹여 살릴 약간의 월급만 주어도 감지덕지 일하는 것이 꼭 그러하다. 농부는 농사만 생각하면 된다며 자연 순응적으로 살았던 농노들과, 과학기술자는 연구만 생각하면 된다며 사회 순응적으로 사는 과학기술인들이 무엇이 다른가?

과학기술인들은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정해야 한다. 봉건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그것은 농노들이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고, 거기에서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을 지배하는 봉건제도는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가?

과학기술인들은 사육되고 있다. 창살 너머로 던져주는 작은 고깃덩이에 만족하며, 그 좁은 철창 내에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며, 그저 고기 좀 더 주면 안되나 목만 빼고 있다. 이왕 던져 들어오는 고기, 남보다 좀 더 먹을 순 없을까 하여 우리 속의 동료를 이기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 일부가 고기를 많이 달라고 투쟁할 때, “쟤들은 밉보였다. 나는 쟤네들을 제낀거다. 바보들. 그런다고 더 줄 것 같냐? 뭐, 혹시나 더 주면 나야 그 덕에 더 먹으면 좋은거고.” 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분명히 있다. 철창 밖의 논리에 의해 교육되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길들여지고 있다. 바깥의 그들은 상당히 영악해서,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시스템에 순응치 않으면 매장해 버리며, 승부욕과 경쟁심만을 가르쳐 잠재적인 적을 패배자로 낙인찍는다.

과학기술인들은 지금의 시스템과 구시대적 패러다임을 인정한 채 투쟁해선 안된다. 현 상황에서 철창 밖으로 많이 진출해서 우리 안의 동료를 돕자는 생각도 그런 면에서 한계가 있다. 철창을 부수고 정글에 나가 정글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당장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지 몰라도 항상 생각은 정글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에 예속된 과학기술인이라는 신봉건제를 깨고 정글의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 과기노(科技奴)로 남을 것인가, 역사의 주체가 될 것인가? 선택은 과학기술인 스스로의 몫이다. 

  • Simon ()

      역시 우리가, 아니 "제가" 운영진을 잘 뽑은 것 같습니다. 모처럼 다시 읽고, 또 생각해 보았는데 크게 공감가는 내용이에요. I like you, and totally agree, So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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