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과 한탕주의" - 최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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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등록일
2002-11-0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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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역시 처음에는 통신공간에 썼다가, (글에서 언급한 '항암제 과장보도' 사건이 있었던 직후인 1998년 6월 경..?) 나중에 '요약본'을 한겨레신문 과학칼럼(21세기를 여는 열쇠)으로 냈고, 이번에 책을 내면서 원문을 약간 고쳐서 실었습니다. (나우누리 웹진에도 게재되었던 원문에는 훨씬 '적나라한' 사례들도 거론을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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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개발과 한탕주의

                                                                최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 中에서 -


몇 년 전인 1998년 5월 무렵, 획기적인 효능의 새로운 항암제 개발 성공을 알리는 보도가 국내 거의 모든 주요 일간신문의 1면 톱기사를 떠들썩하게 장식한 적이 있다. 미국의 한 제약회사가 개발한 `엔지오스타딘'과 `엔도스타딘'이라는 약품이 동물실험 결과 뛰어난 효능을 보였다는 것이었는데, 신문들은 인류가 곧 암이라는 난치병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라는 둥, 개발팀은 차기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이 확실하다는 둥 온갖 장밋빛 전망들을 전하기에 바빴다.

"암 정복 멀지 않았다", "(쥐 실험 결과) 모든 암세포 소멸" 등의 큼직한 기사제목들은 암 환자들 뿐 아니라 암 공포에 시달려 온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대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불과 며칠 뒤, 그 보도가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었으며, 암 정복이 그다지 낙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왔다. 즉 거론된 물질들이 동물실험에서 상당한 효능을 보인 것은 사실일지 모르나, 비슷한 종류의 물질들을 이용하여 이미 인체실험에 돌입했던 경우도 많으며, 동물실험에서는 획기적 암치료제로서 크게 기대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체에는 별 효능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예도 매우 많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 특정 언론사의 한 `벤처기업 살리기'식 보도에 놀아났다는 뒷이야기가 나오는 등 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 3월23일에는 미국 유타대학의 화학자 스탠리 폰즈(Stanley Pons)와 마틴 플라이슈만(Martin Fleischmann)은 기자회견을 열고 상온에서 핵융합 실험을 성공시켰다고 발표했다. 팔라듐 격자로 된 전극 사이로 중수를 전기분해한 결과 많은 열이 발생했는데, 핵융합 반응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1억도 이상의 초고온이 필요한 기존의 핵융합 연구와는 달리, 상온에서도 핵융합이 가능하다는 이 소식은 전세계의 과학자들을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곧 인류의 에너지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과학자들 간의 치열한 논란 끝에 상온핵융합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며, 폰즈와 플라이슈만은 전문 학술지를 통해 검증을 받기도 전에 대중에게 발표해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고 결국 유타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보다 조금 앞서서 한창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고온초전도체' 연구개발 역시 위의 두 가지 경우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한때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가 얼마 못가서 수그러들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노벨물리학상을 고온초전도체 연구자가 수상하게 되고 몇몇 물질에서 초전도를 보이는 온도가 갈수록 높아지자, 고온 초전도체의 개발은 학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어서 국내외의 과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연구개발에 뛰어 들고 관련 논문발표는 갑자기 폭증하였다.

언론에서는 몇 년 안가서 냉장고에 전기를 저장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자기부상열차에도 곧 고온초전도체가 이용되는 등, 금방이라도 고온초전도체가 실용화되어 근대의 산업혁명에 못지않은 혁명적 변혁을 가져올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국내에서도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온도의 고온초전도체가 개발되었다는 등, 제대로 확인도 안 된 부풀리기식 보도가 잇달았음도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고온초전도체는 앞으로 여러 방면에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미래 기술의 하나로 지금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 관련 연구개발 역시 여전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연구개발이 많은 성과를 거두고 또 그것이 실용화에도 성공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측면을 간과한 채, 당장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품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이처럼 한때는 과학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다가도 얼마 안가서 곧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경우는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자들이 '한 건 하고 보자'는 무리하고 조급한 발상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과대 포장하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쓰는 사례들이 국내외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언론의 선정적이고 부정확한 보도와 맞물려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한 두 사람의 걸출한 '스타'가 좌우한다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직적인 연구개발 결과로서 이루어지고, 또한 지속적이고도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한탕주의식 발상으로 과연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큰 사회적 붐을 타고 창업했던 수많은 벤처기업들 중 상당수가 얼마 못가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 또한 결국 꾸준한 연구개발보다는 남보다 먼저 크게 한몫 잡고 보자는 '한탕주의적' 태도가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많은 대학과 정부출연 연구소에서는 지금도 진정한 연구개발은 뒷전이고 큼직한 프로젝트 따오느라 제안서 쓰기에 바쁘고 개발보고서를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홍보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다는 얘기도 가끔씩 들린다. 민간기업 연구소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연구개발 조직의 책임자들은 회사의 기술력을 실질적으로 크게 제고할 수 있는 연구개발보다는 신문, 방송 등지에 크게 보도될 만한 개발이나 최고경영층에게 그럴듯하게 보여서 '한바탕 뜰 수 있는' 분야에만 눈독을 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과학기술자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공명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연구해서 훌륭한 결과를 낸다면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과학기술자는 무슨 속세의 가치와는 인연을 끊은 고고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이야말로 불공평하고 왜곡된 시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적 풍토 하에서, 오랜 기간과 많은 노력을 요하는 중요한 연구개발과제들 및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래에 실용적인 여러 분야에 고루 활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기초과학기술 연구가 과연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까? 그 결과, 미래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파행적인 모습을 면치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20세기 이후의 과학기술 발달사를 잠시 돌이켜 볼 때,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던 기술들이 나중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한 경우가 숱하게 많았고, 또한 그 반대로 당장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어 주목받았던 연구들이 오랫동안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남들의 화려한 주목이나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여부에 관계없이,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연구실을 지키면서 나름의 연구개발에 최선을 다하는 대다수 과학기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과학기술정책 및 사회 풍토가 아쉬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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