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개론'과 '은교'

글쓴이
임춘택
등록일
2012-05-22 09:39
조회
8,3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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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 최근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건축학 개론'과 '은교'가 묘하게 대비된다.
두 영화 모두 개봉한 지 얼마 안 되어 봤던 것인데, 여운이 머리를 맴돌다가 이제야 글로 나타난다.

나이가 19살이 넘은 관계로 두 영화를 비교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데, 일단 두 영화에서 배수지와 김고은이 한가인이나 다른 쟁쟁한 기성 배우들 속에서 돋보이는 스타로 발돋움했다는 점은 인정하자. 건축학 개론에서 조연 '납뜩이' 조정석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면, 은교의 주연 '스승' 박해일은 길지만 지루한 인상을 남겼다. (적어도 나한테는...)

건축학 개론이나 은교 모두 남녀간 사랑을 다룬다. 건축학 개론이 어쩌면 유치하거나 식상할 수도 있는 흔한 청춘의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면, 은교는 실제로는 있기 어려운 노인과 소녀의 사랑, 거기에 스승과 제자가 한 여자를 놓고 질투와 배신을 해대는 희귀한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도 건축학 개론은 풋풋하고 아련하며 가슴아프고 눈물 찔끔 짜게 하는 여운을, 은교는 찝찝하고 살벌하며 (김고은이) 안쓰럽고 거친 여운을 남긴다. 전자가 '어떻게 그 평범한 사랑을 (절제된 표현으로) 그렇게 승화시켰나' 싶은 느낌이라면, 후자는 '어떻게 그 풋풋한 사랑을 (과대한 표현으로) 그렇게 추락시켰나' 싶은 느낌이랄까?

하나 더...
건축학 개론에서는 털털하게 생긴 강사가 '서툰 연애'의 계기가 되는 건물 답사를 숙제로 내는 게 멋있다. (나도 저런 숙제를 내야지!)  제주도에서 서울에 와 처음 정착하게 된 강북의 한 허름한 동네, 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또다른 '서울 촌놈' 공대생과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만남. 이 영화에서, 공부 밖에 모르고 소심한 건축(공)학과 공대생이 환상을 품기에 충분한 발랄한 음대생, 세파에 닳고 닳아 애꿎게 둘 사이를 훼방놓는 같은 과 선배, 세상만사에 경험이 풍부한(?) 납뜩이 친구가 어우러져 그렇게 청춘은 간다. 이 영화는 영화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굳이 '공대' 냄새를 풀풀 풍기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있을 법한 풋풋함을 끄집어냈다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것 같다.

반면, 은교에서는 노골적으로 '공대'에 대한 적개심을 무한 표출한다. 감히 '무기(재료)공학과' 학생이 시를 논하고, 실력이 전혀 없으면서 시인의 제자를 자처하다가, 적선하듯 던져준 작품으로 작가로 데뷰하고 급기야는 '은교'라는 작품을 훔치기까지 한다. 시인인 스승은 절벽 끝에 걸린 은교의 손거울-늘상 은교를 학대하는 엄마가 생일 선물로 줬다는(?!?)-을 목숨을 걸고 찾아주는데 반해, '시를 알 턱이 없는' 제자는 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손거울이라고 하다가 급기야는 은교로부터 '공대생이 무엇을 알아'라고 절규에 가까운 핀잔을 듣는다.

작게는 '공학' 확대하면 '과학기술'을 폄하하고 학대하는 일이야 우리나라에서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최근 20년 사이에 이렇게 적나라하고도 '하나도 재미없게' 공격하는 것은 처음 본다. 이 영화 각본을 쓴 작가나 감독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떻게 그 고운 김고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게 할 수 있을까? 하기사, 이 영화 품평을 전라로 영화에 데뷰한 21살 배우의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부류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이니,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은교(약 150만 관객)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단지 19금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건축학 개론(약 400만명 관객)을 넘을 수 없었던 게 아니다. 평범한 곳에서 순수함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비범함과 수없이 절제된 표현이 관객들에게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던 것은 아닐까? 2012년 올 한 해, 우리가 주목해봐야할 '사회 현상'이 아닐까 싶다.
  • Hallo ()

      은교는 박범신의 소설을 영화한 것임을 고려해야할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아무래도 원작의 디테일들이 많이 생략될 수 밖에 없겠지요. 물론 영화 중 공돌이 캐릭터의 단순무식함에 저도 혀를 차면서 보았습니다만 결국 그게 죽음으로 처벌받을 일까지는 아닌데요 하하. 박범신 작가를 싸이엔지에서 인터뷰라도 해야할 듯 합니다.

    우연치 않게 이번에 한국 방문중에 두 영화를 연이어 보았는데 제게는 은교가 더 좋았습니다. 건축학 개론은 결국 예쁘게 포장되어지기 마련인 과거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지만 은교는 지금, 아니면 미래의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기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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