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詩 와 영 성

글쓴이
Simon
등록일
2003-02-0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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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영성

나는 시를 어떻게 찾아갔던가. 아니, 시가 어떻게 나를 찾아왔던가. 나는 이 두 가지 질문 이 모두 맞다고 생각하지만, 후자 쪽이 더욱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 안에 어떤 마련이, 영혼의 세팅이 있었으리라. 그 때문에 나는 시가, <그것>이 나를 찾아왔을 때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내가 찾아간 어떤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나의 의지를 벗어나는 곳에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것>은 현기증나는 타자의 현현이었다. 신이냐고? 모르겠다. 나는 다만 <그것>이 인간의 이성 안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에 구성되는 특별한 형태의 지성으로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뿐이다. 나는 <그것>이 나를 편안한 일상의 틀로부터 빼어내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제 내 영혼의 입맛이 한도 없이 높아졌다는 것을, 이제 <그것>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자들은 결코 세상 안에서 만족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된다는 것. 따라서 그런 자들은 세상의 편에서 보면, 매혹과 동시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을 결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것>을 잘 이해했던 모든 자들은 길을 열고는 얻어맞아 죽었다. 나는 그렇게 되기 싫었다. 나는 스테파노가 될 생각이 없었다. 어느 시절까지 나는 죽어라고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끌려갔다. 시혼이라는 막강한 천사. 그가 나를 존재의 심연과 꼭대기까지 끌고다니며 보여주었다. 내가 들여다본 현실은 한없이 아름다웠고, 나는 그곳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 백열상태의 감각적 영성은 유지되기 힘들다. 오랫동안 <사막>이 찾아왔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내가 들여다본 <그것>의 자질을 비틀거리며 현실에 통합하는 것. <그것>의 휘황함에 대한 믿음을 인간성의 심화된 유토피아의 팻말로 삼고 현실 안에서 <그것>의 비젼을 실천하는 것. <사막의>, 십자가의 성요한의 용어대로라면 <어둔 밤>의 메마름을 견디면서 현실을 변혁시켜나가는 것. 아, 하기 싫어. 나는 내면의 깊은 충족감 안에 통합되어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순명했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흠씬 두들겨맞았다. 푼수, 또라이, 마녀, 미친 년, 나쁜 년, 악녀, 기타 등등의 평판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곤 문학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용감해졌다. 때로 내면의 힘과 현실적 무력함의 받아들이기 힘든 거리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견뎌내는 힘은 조금씩 커져갔다. 늙어가는 몸은 서서히 자아의 무력함과 비젼의 빛을 겸손하게 통합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영매나 예언자가 아니라 시인이었던 것은, 내가 언어의 일의 의미와 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났던 것같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어떤 내적 세계의 비젼으로 빠져들어가 영영 탈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성의 언어를 무당의 비천한 동굴에 처박아두었던 모국의 전통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될 확률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았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바야흐로 세계는 근대적 이성의 한계를 학적으로 증명하는 맥락 위로 옮겨가고 있으므로. 정신분석학자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미치광이들의 병원에 처박혀 있었던 <그것>의 언어적 의미를 밝은 대낮으로 데리고 나왔다. 특히 여성의 예민한 육체를 통해 침입하고 그 안에서 특이한 분절의 계기를 찾아내는 <그것>. 중세의 비참한 풍경 안에서 마녀들의 혀를 빌어 발설되었던 것. 그러나 몇 명의 여성들은 신성함의 독트린을 독점한 남성들의 잔인한 제도 안에서 그녀들의 언어를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아빌라의 테레자 같은 여성들. 그녀들은 종교재판을 이겨냈다. 그 저주와 동시에 축복의 언어가 왜 21세기의 세속화될대로 세속화된 한국의 탈근대의 풍경 안에서 다시 분출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몸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한국의 맥락 안에서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동시에 포획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것을 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아마도 또다시 긴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을 모국의 문학사적 틀 안에서 설명하기에는 그 양상의 구성 자체가 전혀 다른 맥락의 형성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넓은 범위를 포함하는 파노라마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아마도 사회학, 종교학, 신학까지도 건드려야 충분한 설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게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고, 그리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은 그것이다.

<그것>의 <언어>와 관련하여 첫번째의 장면이 있다. 조그만 계집아이였던 나는 하나의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은 나의 시적 행로 안에서 결정적인 어떤 경험을 구성하고 있다.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해 있는 민족을 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는다. 그는 묻는다. 내가 어떻게? 이 무능력한 내가 어떻게? 신은 그를 호렙산으로 부른다. 그는 모세에게 이곳은 신성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모세는 신발을 벗는다. 모세의 눈 앞에는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이 있다. 그 가시덤불의 화염은 가시덤불을 태우지 않으면서 불타고 있다. 경이와 신비에 놀란 모세는 자신에게 소명을 내리는 화염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민족의 해방을 요구할 것인가를 묻는다. 화염속으로부터 답변이 흘러나온다.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어린 계집아이는 스스로 불타는 가시덤불의 이미지보다도 "스스로 있는 자"라는 언어에 충격을 받는다. "스스로 있는 자"라니? 대체 이것이 무슨 말일까? "스스로 있다"니? 대체 어떻게? 나는 무수한 규정에 의하여 나이다. 나는, 여자아이이며, 강남국민학교 학생이며, 김린모씨와 이양옥씨의 딸이며, 키가 작고 빼빼 마르고 못생겼으며, 운동을 잘 하지 못하고, 겁쟁이이고, 울보이고, 사람들 앞에 서면 기절할 정도로 무서움을 느끼는 대한민국 꼬맹이이며, 기타 등등. 그런데 "스스로 있다"니? 물론, 당시의 내가 명확한 언어를 통해 그런 생각들을 언어로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당시의 내가 느꼈던 충격의 내용이 그런 것들이었을 것같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어쨌든, 삼청동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던 그 날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뿌리깊은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성장한 나는 그 이전에도 수도 없이 그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읽어주시는 구약 성서를 내용으로 한 그림책에 그려져 있던 엑소더스의 장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아버지, 이 사람들 불쌍해, 불쌍해"하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남부여대하고"하는 식으로 얘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구식 수사학도 함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이 의식을 강타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교회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던 빛줄기, 그리고 그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교회 현관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던 꼬맹이들의 신발들이 한꺼번에 기억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빛>의 균질성과 단일성의 맞은편에 있는 어지러운 육체적 현실의 다수성(오, 게다가 가장 낮은 육체인 <발>의 기억이라니!)의 대조가 내 영혼 안에 어떤 구조로 자리잡았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아이가 <빛>과 <육체>의 가운데 쯤 어딘가에 언어가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챈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기억은 훗날 인문학적 훈련에 의하여 재구성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경험이 내 시적 행로 안에서 하나의 원체험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아이는 망할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때 언어가 아니라 차라리 이미지에 매혹되었더라면, 지금쯤 잘 나가는 화가나 영화감독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으련만. 나는 그때 망한 것이다! 물론, 농담삼아 하는 말이다. 나는 시인으로서의 내 생애를 후회하지 않는다. 외롭고 피곤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이 위엄에 가득찬 언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는 호렙의 불꽃의 이미지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언어로부터 받은 충격을 영혼 깊은 곳에 저장해 두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시의 원형적 이미지였다. "스스로 있는 자"의 입으로부터 발설되는 언어, 또는 <스스로 있음>의 상태에 도달한 언어의 자기충족성. 나는 아직도 이 장면을 충분히 해석해내지 못한다. 다만, 나의 관심이 <신의 존재>로부터,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주체로부터 옮겨와 있다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신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신에 대한 지식이 현단계의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대신에 나는 신성함을 인지하는 주체의 양상에 더욱더 마음이 끌린다. 나는 주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주체성의 신성한 심화에 이르는지, 그리고 언어가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더욱더 관심이 있다. 아마 좀더 늙으면 다시 신에게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더 세상에서 부대낄 생각이다. 아무튼,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또는 <그것>이 아닌가. 그 <묶임>이 소진될 때까지, 주체의 완벽한 해방에 이를 때까지, 나는 세상의 잡다함 안에 <그것>의 자질을 섞어넣을 것이다. 당연히, <인문학적 무늬>(김영민의 용어)의 형태로(이 지점에서 나는 신성함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접근으로부터 비껴간다).

언어는(특히 시적 언어)는 육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현하기 위해서 시니피앙이라는 가시덤불을 필요로 한다. 언어는 알려진 바와 같이 순수추상이 아니다. 그것의 한쪽은 물질이다. 신조차도 말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해야 했다. 창조가 없었더라면, 신이 <말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원초적인 타자의 현현(언어를 통한)은 어떤 주체가 가장 심화된 개인성에 이르렀을 때, 그것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상징적 이미지이다. 상징적 이미지는 사유 이전과 사유 이후에 있다. 이미지는 전존재이거나 후존재이다. 이미지의 현현을 인식하는 주체는 실존의 영역에서 존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고요. 차기충족성. "스스로 있음." 주체의 심화된 양상의 상징으로서의 가시덤불은 그 활발한 행동성(불타는 가시덤불)으로 특화된다. 그 양상 안에서 주체는 주체이기 위해서 타자를 소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자이며 동시에 타자이다. 그는 타자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완벽한 상태에 이른다. <스스로 있는> 화염은 가시덤불이라는 육체성을 매개로 현현하지만(오 모든 귀신들은 인간의 육체를 꿈꾼다! <있음>의 안온함이라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발화 상태에서 스스로 충족되어 있다. 따라서 완벽한 주체의 심화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더 나아가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한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잔인한 십자가형과 화형이다. 그러나 이 언명은 사실 종교적이기만 언명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해방>의 선언이기도 하다. <신성함>이라는 주체의 가장 완벽한 존재성은 왕들과 사제에 의해서만 부여되는 것이었다. 민중은 지배계층에의 복속에 의거하여 존재성을 분양받는다. 존재의 의미의 생성기제는 왕과 사제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건방지게 나자레의 거렁뱅이가, 별볼일없는 가난뱅이 수도사가 스스로 완벽한 존재성을 구현했다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민중에게 분양해 주겠다고("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떠든다니, 저 건방진 놈을 잡아 죽여라! 왕과 사제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울부짖는다(멀리 갈 것도 없다. 아젠다 설정 기능을 별볼일 없는 네티즌들에게 빼앗겠다고 연일 인터넷을 저주하고 있는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류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언어, 즉 존재의 의미 생성기제는 그들의 전유물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터넷 게토의 거지들이 넘보다니, 저들을 잡아들여 <피투성이>로 만들어라! 이른바 <살생부> 파동의 본질은 그것이다. 자신의 아이디를 <피투성이>로 정한 철공소 직원의 민중적 직관력은 놀랍지 않은가).

호렙산의 화염에는 정치적 <해방>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집트의 노예상태라는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열망은 신의 목소리의 형태로 모세의 정신을 뒤집어 고양시킨다. 그의 정신은 해방의 열망으로 인하여 <산정>으로 올라간다. 그곳은 <신성한> 땅, 주체가 일체의 규정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따라서 <맨발>로 있어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주체는 신성함에 노출된다. 그는 자유로운 자, <스스로 있는 자>, 아니다, 해방의 열망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스스로 있음>의 상태로 밀어올린 자이다. 그 상태는 여호와처럼 존재의 물질성을 부정하고, 존재한다는 일 하나만으로 의미의 궁극을 달성한다. 이른 바 <믿음>이라는, 존재를 허공으로 토스하는 행위에 의하여. 여호와는 민중을 밀어붙인다. 그는 그들로부터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물질적 이미지를 빼앗는다. 모세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의미생성기제를 순수추상인 언어만으로 한정하려고 했다. 모든 추상적 언어 기호는 얼마나 투명하고 안정적인가. 그것은 죽음을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플라톤이 시를 증오했던 이유도 알만하다. 시적 언어는 순수추상이 아니다. 모세가 시를 이해했더라면, 그는 언어가 이미 이미지인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왜 신이 가시덤불의 모양으로 그에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했다면, 그는 민중에게 이미지를 허용했을 것이다. 모세의 <말씀>의 배타적인 존재 분양 방식에 불안해진 백성은 또다시 황야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기 시작한다. 가엾은 민중(물론 나도 그 일부이다)은 언어만으로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또는 인식의 여성성이 필요했다(금송아지가 여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

아마도 나의 시는 앞으로 심화된 주체의 존재론과 현실적 해방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래 씨름해야 할 것이다. 주체의 심화에 관한 한, 나는 [이미지들] 연작과 [홀로그램] 연작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는 나를 아주 깊이 만족시켜 주었다. {용연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두 시집의 영적 내면탐구는 호렙산의 불꽃처럼 정치적인 의미로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첩된 층위가 너무나 본질적인 층위여서 그것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보이는 것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같다. 나의 영적 탐구는 현실을 비켜가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반조선일보 운동을 통해 시작된 나의 현실참여가 언어의 점령군들과 싸우는 언어 해방으로서의 문학적 의미를 가진 정치적 행동이라는 것도 전혀 뜬금없는 행보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있어서 오히려 매우 반체제적이고 민중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여성적 인식을 대중과 소통하는 데에는 여전히 지난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전근대 사회였다면 대지적 상상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민중이 주체 안에 자연스럽게 통합된 형태로 알고 있었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라는 주제라는 것이, 산업화와 함께 진행되어온 세속화의 국면 안에서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신성함을 잊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제 고도의 교양이나 학습의 대상처럼 여겨진다. 게다가, 근대적 주체 연습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 사회 안에서 이 주제는 황당한 잠꼬대처럼 여겨지기마저 한다(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그 숱한 포스트모던 담론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포스트모더니즘이지, 우리의 지식사회 또는 문화계 전반은 여전히 근대적/계몽적 이성의 모노폴리에 지배당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본질적으로 너무나 반부르조아적인 이 모색을 부르조아적이라고 생각하는 황당한 오해도 왕왕 벌어지고 있다. 이 오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 있음>의 의미를 좀더 평이한 언어로 풀어내어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을 고민중이다. 아직은 분명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가슴으로 애쓰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운명이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 두었기를 바랄 뿐이다.

원저자: 시인 김정란
퍼온곳: rannie.net
(주) 원저자의 허가 아래 본 게시판에 복사하였습니다 - 심 준완 Simon 2/8/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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