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파에 밀리고 계약직에 시름 [02.12.26/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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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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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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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와중에 주요 대학의 입학원서 접수가 막을 내렸다. 선거 못지않게 뜨거운 입시경쟁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대학 정원 증가와 고등학생 수 감소로 인해 단순 수치상의 경쟁률은 몇년 전에 비해 크게 낮아졌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학교와 유망 학과에 입학하려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열기는 여전했다.

대학 입시에 비해 대중의 관심도는 떨어지지만, 11월에는 학교별로 대학원 입시가 있었다. 요즘엔 대학원 진학 때 대학간 이동이 흔해 희망하는 전공과 더 나은 학업 조건을 찾아 이 대학 저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많다. 국내 대학원이 한창 인기 있었던 90년대 중반에는, 인기 학과, 비인기 학과를 가리지 않고 경쟁률이 치솟아 '대학원 재수생'인 학부 5학년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일찌감치 대학원 중심 대학을 표방한 서울대는 그 목표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 대학원 입시에서 처음으로 박사과정 미달 사태를 겪더니 올해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지난해 0.87 대 1에 그쳤던 박사과정 경쟁률은 올해에는 0.85 대 1로 떨어졌다. 비교적 취업이 잘 된다고 알려진 공대와 자연대 박사과정에서도 큰 폭의 미달 사태가 발생했다. 석사과정은 미달 사태를 면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예전과는 다른 양상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본교 출신들이 대학원 진학을 외면하는 가운데, 다른 대학 졸업자들이 합격자의 절반을 넘었다. 이런 결과는 이른바 '학벌주의' 완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환영받았으나, 서울대에 대학원 진학자를 졸지에 빼앗긴 다른 대학들, 특히 지방 국립대의 대학원 공동화를 촉진하는 부정적 효과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공계 대학원은 단순히 개인의 학문적 성취를 위한 곳이 아니다. 수많은 국가 연구과제를 비롯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벤처기업에 이르는 기업체들의 연구용역을 받아 일하고 있는, 실질적인 국가 연구개발(R&D) 중심축의 하나이다. 돈 되지 않는 연구를 기피하는 국내 기업의 풍토 때문에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는 대부분 대학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 대학원생은 직접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는 핵심 인력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석사과정 이명재씨는 "주변 사람들이 대학원생은 강의만 들으러 다니면 되는 것으로 아는지 방학 때도 학교에 나가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은 직장인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공계 대학원의 공동화가 국가 연구개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견해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내 대학원이 비어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공대 박사과정 정승호씨는 "박사 학위를 따 봐야 취업할 곳은 한정되고, 사회적 경제적 보상이 괜찮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정부출연연구소나 대기업 연구소에 취업하는 이른바 '잘 된 경우'에 초임 연봉은 3천만원에서 4천만원 수준이다. 우리 사회의 평균 임금에 비해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용카드업계의 대졸 신입사원 초임이 3400만원을 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적잖은 '상실감'을 느낀다고 한다. 금융권이나 대기업 사무직에 비하면 6~8년의 연구경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정부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계약직이나 박사후과정(Post-Doc) 인력을 대상으로 신규채용이 이뤄지고 있어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심각하다. 지난해 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한 김아무개씨는 "새로 들어오는 연구원은 전부가 계약직"이라며 "정식 채용 여부는 1년 뒤에나 결정된다"고 말한다. 계약직 박사후과정 인력의 연봉은 1200만원에서 2400만원이다.

한창 일할 나이의 박사들이 비정규직을 떠돌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과학기술부의 '인력 저수조 개념'이 종종 도마에 오른다. 이 개념에 따르면 정부출연연구소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의 임시집합소에 불과하다. 과기부 최석식 과학기술정책실장은 한 토론회에 참석해 질의응답을 통해 "인력 저수조 개념을 철회할 계획이 없다"며 "신진 연구원들 본인에게도 그런 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 대학과 기업체의 맹목적인 '외국 박사' 선호에도 국내 대학 공동화의 책임이 있다. 대학 교수가 되려면 외국 명문대의 학위가 필수라는 인식은 오래 된 것이지만, 최근에는 기업체들까지 나서 국내 인재를 외면하고 유학파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삼성, 엘지 등 대기업들은 최근 미국 전역을 돌며 우수 유학생 유치작전을 폈다. 삼성은 아예 5천억원 규모의 유학생 지원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남아무개씨는 "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연구용역을 수행한 대기업 연구소에 지원했으나 외국 박사후과정 경력을 요구하는 바람에 면접에서 떨어졌다"며 "내 전공과 맞는 곳에 가지 못했으니 이제 취업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실험실을 지키고 있는 대학원생의 상당수는 이른바 전문연구요원으로 병역특례 복무 중인 이들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난 2월 서울대 이공계 단과대 학장들은 정부를 상대로 "병역특례 정원을 확대하고 복무기간을 단축해달라"는 건의문을 냈다. 국내 대학원을 유지하려면 병역특례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학원 실험실이 비어가는데도 정부는 국내 대학원을 살릴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고등학생들을 이공계로 유인하겠다며 매년 300억원 규모의 이공계 유학경비 지원책을 내놓았다. 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배성원 박사는 "고급 인재 육성을 외국에 위탁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며 "외국에 나간 인재들이 애국심을 발휘해 연구환경이 척박한 고국으로 돌아와 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고 말했다. 결국 남의 나라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것이다.

박상욱/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박스 기사>
지난 10월 한국과학기술인연합( www.scieng.net)은 이공계 대학원 문제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원 연구의 질을 개선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8%가 '대학원생의 학비, 생활비 지원'이라고 답했다.

현재 '두뇌한국21'(BK21) 사업을 통해 극히 일부의 대학원생에게 매달 40만~72만원의 학업보조금이 지급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 김용국씨는 "두뇌한국21 지원금도 충분한 액수는 아니지만, 이런 지원이라도 전국의 모든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 게시판 아이디(ID) '놀자박사'는 "프로젝트 인건비만 제대로 지급되어도 살만할 것"이라며 "외국에 유학한 친구들을 보면 생활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부럽다"고 말했다.

'국내 이공계 대학원 기피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국내 학위자 우대'라는 응답이 46%로 가장 많았다.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의 맹성렬씨는 "국내 학위자를 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면서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며 "교수 임용 때 국내 학위자를 일정 비율 뽑도록 하고, 기업체 연구원 채용 때 연구용역 수행 경력에 가산점을 주는 방식 등을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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