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노벨상 받으려면 [03.02.17/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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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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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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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KIST의 한 책임연구원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다. 식사 중에 그분은 지난 13년간 한가지 문제에 골몰하여 연구해왔으며 최근 마침내 그 결실을 맺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이 몰두했던 연구는 로켓이나 우주선 등의 표면에 사용되는 방열 코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성과는 우연한 실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세계의 과학사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은 우연에 의해서 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벤젠의 육각형 고리 구조는 꿈속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런데 이런 유의 에피소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과를 이룬 이면에는 대개 놀라울 정도의 집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벤젠 고리 구조를 꿈속에서 보았던 일도 이런 집념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연구개발자가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연구개발에서 무아 상태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이공계 분야의 노벨상을 받기를 원한다면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이런 몰입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에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며칠 전 모처럼 대학 동기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최근 프로젝트 평가와 관련해 하소연을 들었다. 중장기 과제임에도 매년 과제를 평가해 20%씩 자르겠다는 관계 부처의 방침에 한 친구가 분통을 터뜨리며 그러면 5년 과제가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인지 한번 계산해보자고 제의했다. 어림셈을 해보니 30% 남짓 되었다. 경제논리에 따라 프로젝트 경쟁력을 기르는 것도 좋지만 프로젝트가 정해놓은 기간 중에 절반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데 모두들 공감했다. 과제를 평가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전문성이 있는지 여부를 여기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의 상식이 살아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옛말에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 만 못하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연구개발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에든 간 만큼 이익이다! 족집게 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분야가 언제 어떻게 성공할지 꼭 집어서 미리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우연에 의한 발견·발명이 대박으로 이어질 수 있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연구개발에서만큼은 경제논리에 치우친 근시안적 투자 개념을 무리하게 적용하면 안된다. 하지만 현 연구개발 풍토는 황금알을 낳을지 모르는 값비싼 거위를 알도 낳기 전에 배를 갈라 죽이는 형국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연구개발의 올바른 토대 구축을 위해 제언을 한마디 한다면 제발 조급증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프로젝트를 단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평가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 프로젝트가 범국가적 차원의 로드맵 상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어떤 시금석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보다 평가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싶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털어버리려는 식의 정책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쌓이도록 가꾸어나가는 정책을 펼 때이다. 진정한 과학기술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구축하려면 말이다.

맹성렬/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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