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재부흥 선언

글쓴이
과학도
등록일
2002-03-0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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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거창해 쑥스럽군요. 2년전에 썼던 글입니다. 그때의 열정을 삭혀 문명의 톱니바퀴가 되어(처음에는 작겠지만 점점 커가는)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기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

"아버지. 저 다산 선생 문하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끼 이 녀석! 그 따위 상것들의 학문을 배워 뭣에 쓸려고. 과거 시험이나 볼것이지. 고얀 것.. 다시 꺼내지도 말렸다!"

조선 말기 있었을 부자간의 대화를 상상해본다. 우리 역사에는 분명 실학이라는 단절적 학문이 나타난 시기가 있다. 이를 혹자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럴만할까?

실학이 그 이상대로 사회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쳤으면 공로를 인정받아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못 했다. 실학은 그저 개별 학자들의 연구에 그쳤으며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 되지 못했다. 그럼 왜?

물론 그들 각자가 소통에 소홀하고 힘써 조직화하지 못한 탓도 없지 않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명분론에 찌들은 조선 선비들의 시각으로는 실증적/경험주의적 태도란 천한 장인바치들의 것에 불과했다.

명분과 사변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이나 실질적 도구의 제작에 열중하는 실학도들의 행태는 당시를 지배하던 인문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지식인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것에 불과하며 이질적이고 때론 위협적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크게 관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외지로 전전내지는 모함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던 역사가 입증한다.

세종이나 성종과 같은 유달리 과학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현군들이 집권을 계속 했더라면 실학은 비서구 문화권에서 드물게 자생적으로 과학으로 성장하는 역사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더라면 결코 조선이 일본에 무력히 병합당하는 비극 또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시일야방성대곡'의 황시연의 태도 역시 사실 실학을 배척했던 명분론자들의 그것에 불과하다. 지나고 나서 핏대 올려 무엇하리.) 여하튼 여러 실용적 산물을 내놓았지만 인정 받지 못하던 정양용 형제들의 삶은 이것이 당시 기득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거부되었나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런 난관은 실학자들에게만 국한되었었는가? 일찍이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청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발전된 서양의 문물과 사상에 접하고 볼모의 설움을 국가개혁의 이상으로 불태우며 엄청난 열의로 실학을 흡수한다. 그는 아마 동시대 아시아 지도자중 가장 높은 수준의 근대지식에 접한 진취적 현군으로 어쩌면 한국의 표트르 대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독살에 의한 무참한 최후뿐이었다.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청의 고위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현대적 경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까지 했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변적 명분론에 휩싸인 조정대신과 선왕의 증오뿐이었던 것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조국을 사랑했던, 그래서 삼전도의 치욕마저도 극복할 수 있었던 장래의 현군이 조선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었을 기회는 이렇게.. 허무히 사라져버렸다.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러한 실학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의 의미를 현재에서 깨닫고 받아들이는고 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비록 실학이 오늘날로 치면 기술적 공학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동양사회에서 부족하던 자연질서에 대한 실재론등 근대성의 정수 또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식인,위정자들은 그들의 정치와 사상만을 받아들인 모양일뿐 근대정신의 필수인 실용주의적 사고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하다.

외형적으로 한국의  공학은 무척 성장하여 국가 경제에 미치는 의의를 누구나 인정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공학은 그 특성상 어느 단계부터는 창조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반드시 요구하며 또한 이들(순수과학자 집단)이 대표하는 특수 지식인으로서의 위상 향상 또한 필요로 한다.

기술이 정당한 사회적 위상을 차지하는 과학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억압될 경우 국가의 운명 자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타국에 멸망,흡수되거나 또는 자체적으로 명을 다한 역사속의 수많은 국가들이 실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문 지식인들은 다시 한번 돌아오는 도약의 대세에 대해 발목을 잡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사리사욕 없이 연구에 정진하는 그리고 그것에 필요한 사심없는 연구비에 대해까지 트집을 잡는 실정이다.

심지어 과학이 그 멋진 '문민'의 집단에 들어가는 지도 의문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등 선진 국가들의 경우 상징적/실질적 국가원수를 과학도,공학도가 한번쯤은 거친 역사가 있으며 오직 미국만이 그 특유의 합리/실용주의로 인해 순수한 문민 통치를 유지해왔을 뿐이다.-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은 틀린말이다. 건국의 아버지인 프랭클린은 아마츄어 과학자였고 워싱턴도 측량기사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이것은 비단 멀리 볼것이 아니라 우리와 달리 IMF를 비껴간 대만의 경우만 보더라도 순수과학자인 이원철 박사가 사실상 정권을 초월하는 영도자로서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또 인정받고 있음을 들을 수 있다.

지나족(본토중국, 대만)에 대해 우리가 앞선것도 많으나 오히려 나는 근본적 저력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보다 열악하다고 본다. 아편전쟁과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열강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통해 그들은 국력의 원천이 과학에 있음을 일찍이 깨달았고 손문 및 임어당과 같은 인문 지식인들의 경우에 그러한 인식이 더욱 철저했음을 우리는 지켜본다.

우리 역시 "중체서용"을 모방한 "동도서기"를 내세우기는 했으나 과연 손문 및 임어당과 같은 '의식에 있어서의 과학과 실용주의의 중요성'에 각성한 지식인이 몇이 있었는가 진심으로 의문이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좋은 실용/합리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관찰력의 산실인 '자산어보', 백과전서파의 시초라 할 '성호사설', 기계공학의 선구라 할 '거중기' 그리고 넓게 보아 고정관념의 실용적 탈피를 보여준 거북선등 세계에 내세울 만한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고유의 실용적/지적 전통을 계승해오지 못한데는 과학기술자들의 과오도 크다. 그들은 충분히 조직화되지 못했으며 종종 빠지기 쉬운 고립적 성향을 극복하지 못 했다. 이에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자 하는 새 세대의 과학도/공학도들은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과 과학적 사고의 위상과 평가가 우리사회에서 좀더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헛된 엘리티즘을 과감히 버리는 과학도/공학도들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는 오로지 '과학'과 '실용','합리'의 이름앞에서 뭉쳐야 하며 또한 평등하다. 분쟁의 의미 없음을 깨닫고 개척정신과 진취적 사고에 눈떠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많은 미망을 제거하고 박애와 계몽의 기풍이 넘치는 사회의 선두에 서야한다.

또한 이를 위해선 이미 영향력을 가진 인문지식인들의 우호적 협조도 절실히 필요하다.

민족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그러나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매달릴 것은 오직 과학과 기술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럴 수 있을 충분한 지적소양과 진취성,실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좁은 과거를 벗어나 넓은 안목을 기를때다. 그러기 위해선 합리적 사고력 향상의 지름길인 과학학습과 계몽에 모두 힘써야만 한다. 과학과 실학정신은 현시대에 있어 더욱 절실한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 배성원 ()

      훌륭합니다.

  • 임도진 ()

      우리 모임의 '기본 헌장' 후보 1순위 입니다.

  • 김덕양 ()

      추천 합니다. 시쳇말로 강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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