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Y 어떤 기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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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
등록일
2002-05-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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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와 삼성을 비교하는 논쟁이 잦길래 썼던 글입니다. 중간에 약간 고증상의 문제-트랜지
스터의 생산은 레코더에 한참 뒤이은 것이었음-가 있으나 제가 지금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일단 그냥 올려봅니다. 심각한 이야기는 싫으시다면 후반부의 제 핏대올림은 읽지
마시구요. 주말 연휴 혹 무료하시다면 소니라는 기업의 역사에 대해 알게되는것도 무료함을
달래는데 도움되었으면 싶군요.)

소니는 두명에 의해 공동창업되었습니다. 십 몇세 연상의 기계공학도 출신의 전자기술자
이부카 마사루와 지방대(오사카대) 물리학과를 나온 모리타 아키오.

이부카의 아버지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전기 엔지니어였습니다. 결혼을 잘 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이부카의 일생에-물론 가장 중요히는 아버지의 직업으로부터-영향을 줍니다. 이부카는
어린시절부터 발명과 공작에 소질을 보여 와세다대 공학부에 입학한 직후 전도유망한 청년
발명왕으로 전국지에 소개되고 실제로 국제 발명전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계공학
을 전공했지만 기계뿐만 아니라 회로를 다루는 솜씨도 일품이어서 2차대전이 벌어지자(어느
나라든 전쟁이 일어나면 엔지니어들이 실력만으로 평가,대우 받는것은 사실입니다.) 해군
연구소에 징집됩니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인 모리타 아키오를 만나게 되는데 아키오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평생 그를 존중하고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이부카의
성향은 전형적인 기술자로서, 꾸밈과 가식이 없고 세속에 대한 관심이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술자들이 최선의 연구환경에서 작업하도록 지원하고 평생 기계와 회로에 대한 관심
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죠. 그는 종전 후 연구소의 동료 및 자신을 추종해 전국에서 찾아
온 엔지니어들(7명이었던 이들은 훗날 소니 내부에서 7인의 사무라이라 불리우게 됩니다.)을
모아 동경에서 자그마한 전파상을 개업합니다. (이름하여 동경전기공업사. 소니로 개명전의
이름이죠) 놀라운 사실은 그가 어마어마한 처가를 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발이 넓은
어머니의 중매로 그는 주미 일본문화원장과 대전시 문부상을 지낸 집안의 여자를 아내로 맞
습니다. 일본 사회란게 인맥이 워낙 강하다는걸 아시겠지만 이후 소니 창업시 그의 장인은
제국은행장(한국은행에 해당)과 은행협회장을 역임하고 전시 금융을 총괄하던 친우를 소개
해주었고 말할 필요 없이 그는 또 미쓰비시등 유력 은행장들의 SONY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을 보장했습니다. 하지만 종전 시점의 이부카는 이런 유리한 여건따위엔 초연한 인물이었
습니다.

한편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 유수의 양조업 가문의 당주였다고 하네요. 즉 그는 없는게 없는
풍족한 가정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세계의 명사들을 상대로 자신감 넘치는 교유를 펼칠 수 있었던 여건이라는데 많은 이들이
인정합니다.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공작에 흥미가 있었고 지방대이긴 하지만 오사카대
물리학과를 수료합니다. 장교 과정 임관 후 해군연구소에 뽑혔고 그의 말에 의하면 핵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이 (기술력의 격차로 인해) 승산없음
을 인지하던 대부분의 연구원들과 마찬가지로(이부카도 역시. 사실 우리가 일본과 현재
전쟁을 하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우리 과학기술자들은 선동자들보다 잘 알고 있겠죠?)
그는 종전을 기뻐하며 새로운 차원의 전장을 준비했습니다. 그를 말하는데 있어서 빠지지
않는 것은 그가 전형적인 일본애국자라는 사실인데 이는 전통을 중시하는(그의 집안은 정기
적으로 문중회의를 개최하고 거기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서열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
지는 전형적인 일본의 가부장적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주였지만 아버지의 재량으로 자신의
동생에게 그 자리를 양도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는 아키오의 아들이 다시 맡습니다.)하는 가
정환경에서 형성된 국가관이 장교교육으로 더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전후 일본 최초의 진정한 세계인으로 기억됩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논의가 벌어진다는 혐의마저 받는 삼각회의(트라이  )를 록펠러,키신져와 주도하여 창설하고
사업과 애국, 세계의 방향을 이끄는 3가지를 언제나 동시에 추구하려 한 그의 혜안은 일본인
들의 사고수준의 스케일을 우리보다 저만치 앞서 가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아키오가 이부카를 찾아가 동업을 제의했고 둘은 의기투합하여 오늘날 벤쳐의 전신
으로 평가받는 소니의 전신을 창립합니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이부카의 인맥이 활성화되고
아키오 가문 역시 막대한 현금투자보증과 유능한 경영스탭들을 조건없이 지원했습니다.

소니의 창업은, 사과상자에서 거창한 연설을 했다는 손정의 회장의 경우에서 보듯 원대한
목표와 이상을 담은 연설로 시작합니다. 이부카의 입장을 담아 "기술자의 천국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데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아키오의 입장을 담은 "그로부터
세계에의 이바지와 일본의 부흥을 꾀한다"는 골자의 창립이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원대하고 꽤 낭만적이기까지 함을 부인할 수 없겠지요.

소니의 첫 사업은 대전시 채널이 고정되어 있던 라디오의 채널을 고쳐주는 것이었는데 재미를
못 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아키오는 자주 미국출장을 통해 일본에서도 장차
팔릴만한 아이템을 조사했는데(실질적인 최고의사결정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업상의
외유도 열린 마인드와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죠. 그리고 사업방향에 관한 한
기술자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따랐고 아키오 역시 이부카에 대한 애정이 반영하듯 최대한의
존중으로 그들을 대하는 ,열린 마인드를 가진 과학도 출신의 경영인과 소박하고 견실한 엔지
니어들간의 이상적인 공생관계였다 하겠습니다.-쓰는 제가 왜 가슴이 뭉클한건지..)

아키오가 가져온 첫 아이템은 사운드녹음을 간편하게 해줄 수 있는 포터블(사실은 포터블이
아니고 책상만했지만 전문적인 녹음실을 빌리지 않아도) 레코더였습니다. 삼성을 깎아내리는
분들이 착각하시는게 있는데 "남이 만들어놓은 기술 가져다 만드는 삼성이 어떻게 소니와
상대되는가"라고 하시는데 천만의 말씀. 소니 역시 (대표적인 아이템들 중) 하나도 완전히
자신들이 창조한 아이템이 없습니다.

이 레코더를 소형화하기 위해 당시 응용분야가 아직 뚜렷치 않았던 미국에서 개발된 트랜지스터
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상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흥정 끝에 트랜지스터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미국인 엔지니어로부터 이것을 너희들이
모방해내면 장을 지지겠다는 식의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그들의 경계심을 부풀리지 않고
정수를 빼오는 소니 특유의 방법을 사용하여 결국 그 기술을 고스란히 입수합니다. 그 방법은
공학적 이해를 겸비한 소수의 엘리트 과학도를 투입하는 것인데요 이때는 동경대 물리학과 출신의
그의 매형을 보냈습니다.(인맥 한번 끝내주네요) 그는 거기서 생산에 관한 전 분야를 각고의
노력끝에 단시일에 파악하고 소니에 있어 역사적 의미를 지닌(미국 기술의 모방을 주전략으로
성장한 일본의 전후부흥에 있어서도 큰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는) 수장의 정선된 리포트를 본사에
보냅니다. 소니의 엔지니어들 역시 기계라면 알아주던 이들이었으므로 밤낮을 세워 그 기계를
재현해냅니다.(아키오의 매형은 당연히 이후 고위중역을 역임합니다. 더 좋은 직장이 있었음에도
처남을 선택한 그의 결단의 보상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아차! 심각한 문제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녹음내용을 담을 릴 테이프를 만들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테이프를 독점 공급하던 업체는 독일업체 하나뿐이었는데
소니가 취한 방법은 상당히 무대뽀적인 것으로 그것의 조성과 소재를 수소문+추정해 직접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점을 두어 말하겠지만 소니내에서는 순수과학도들의 입지가 강한데 여기에서
발휘된 것이 아키오가 "그건 이럴 수 밖에 없을거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이용했던거죠.
곧 천 테이프를 적당한 폭으로 자르고 거기에다 철가루와 화합물을 (실패를 거듭하며) 섞어 발라
마침내 녹음과 재현이 되는 테이프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때 그 섞은 가루를
후라이팬에 굽고 풀과 개어 귀얄로 정성스레 발랐다더군요.)

이것을 가지고 아키오와 이부카는 우선 음악학교와 방송사를 찾아다녔습니다. 몇가지의 문제로
납품을 번번히 거절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후 소니를 이끌 청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데이라는
이 소년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시절 기흉(결핵이었던가..)을 앓아 휴학을 했었습
니다. 그 과정에서 부유한 집안이 몰려 거주하는 이 동네의 건너편 집에 사는 은퇴한 교양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역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대를 나온 전자 엔지니어였으나
부인을 잃은 충격으로 은퇴한 홀아비였죠. 공학 전반에 대한 지식과 음악적 교양을 겸비한 이 사
람의 눈에 띄어 이데이는 개인교습을 받아 이윽고 양쪽 모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악을
꿈꾸던 이 소년은 음악학교를 택했고 그곳에서 일본인답지 않은 당참으로 학교 교무회의에 동석
하던 "난 놈"이었습니다.-일본은.. 이지메도 있지만 되는놈은 파격적으로 밀어주는 면이 있더군요.
일본과 독일은.. 사람의 소질과 능력의 격차를 인정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장점이 되는군요.

이데이는 이부카와 아키오가 팔러 온 레코더를 "기계에도 능통한 학생대표"의 자격으로 살펴
보면서 당돌한 지적들을 내놓습니다. 이부카와 아키오는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가 이후 이데이
를 전문경영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합니다. 즉 출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일주
일에 한번씩만 들러라. 학비 및 용돈도 책임지마... 이때 아키오는 이데이에게 경영을 맡기겠다
는 암시를 했고 이부카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데이는 어찌나 콧대가 높았던지(그럴만도
했던게 당시 이미 굴지의 기업이었던 히타치,도시바에 비해 소니는 평생을 걸기엔 하찮은 벤쳐
였으니까요. 거기에다 음악인 특유의 우월의식도 상당했습니다.) 그런 지원은 당연하듯 받고
(물론 가끔 가서 제품 모니터링을 해주고, 엔지니어들도 어린 소년의 지적에 사심없이 대응합니
다.) 성악가로서의 길을 계속 걷습니다. 한 김에 이데이의 얘기를 마치자면, 독일 유학시 독일의
선진기술을 그 특유의 지식으로 이해하여 소니에 보고하고 귀국 후에는 국립 오페라단의 주연급
성악가로서 소니의 과장직을 겸임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공연에서, 소니에서의 업무로 인해 누적
된 피로가 가져온 졸음으로 자신의 순서를 놓친 후 경영인으로서의 전업을 결심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답게 "자신의 부하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데이의 중요한 의의는 소니
를 오늘날과 같은 세련되고 흥미로우며 감성적인 이미지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이데이가 바로 그 유명한 SONY의 상호를 만든 사람이며 그 전의 소니는 여느 회사와 다름없이
약간 촌스럽고 투박한 사풍이어서 이데이가 많은 부분을 개혁했다고 합니다. 즉 이데이는 순수과
학도의 시야와 귀족으로서의 국제감각(아키오), 기술적 지식에 대한 이해와 개발진에 대한 중점
적 지원(이부카)에 독특한 감성과 파격적 사고라는 사풍을 더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돌아가서 이데이의 지적으로 미비점을 보완하고 점차 소형화해가면서 레코더는 훌륭한
수입원이 되었는데 이것이 워크맨의 신화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어느날 갑자기
된것이 아니고 기술자들의 피와 땀으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이란겁니다.) 이런 자랑할
만한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템을 위해 아키오는 여전히 조사에 열심이었는데 다음
아이템으로 들어 온 것이 당시 막 실용화되고 있던 컬러 텔레비젼이었습니다. 컬러 텔레비젼은
브라운관에 있어서 몇가지 방식이 경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소니는 과감히 다른업체가 기피
하던 수평배열전자총 방식을 택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부카가 결정한 이 방향은 이후 소니를
한때 최악의 위기까지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키오는 항상 그랬듯 물리학도를 팀장
으로 하는 기술습득팀을 미국 연구소에 보냈고(이때 역시 영세한 연구소였다함) 곧 기본적인
내용을 입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맹하나 없이 개발하는 수평배열전자총방식(오늘날 트리니
트론이라 불리게 된) 정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나 봅니다. 이 과정에서 아키오마저 답답한
나머지 이부카에게 완곡하나마 불만을 내비칠 정도였다니까요. 하지만 영상품질에 대한 확
고한 믿음으로 이부카는 기술자들을 독려 또 독려하여 마침내 색재현에서 추종을 불허한다는
소니의 트리니트론을 개발해내는 개가를 이룩합니다.

지루하시면 쉬었다 읽으셔도 되겠습니다만 저는 계속 쓰겠습니다.






이런식으로 하나의 아이템의 개발 성공과 런칭후 들어오는 이익에 안주치 않고 소니는 마침내
세계적인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창립시의 목표를 관철하려 합니다. 아키오는 아예 미국으로
가족과 이민했습니다. (소니를 세계적 업체로 성장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이때부터 아키오의 행적은 (소니의 역사 자체가 그렇지만)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는
업체를 돌아다니며 홍보를 하는 대신 세계의 경제수도인 뉴욕의 가장 번화가에 미주지사를
차리고 워싱턴을 빈번히 오가며 미국의 정관재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에 들어갑니다. 회사
자체는 아직 비중이 거의 없었지만 그의 이러한 인맥은 훗날 막대한 소니의 힘, 아니 일본의
힘으로 작용하게 되죠. 그의 집에서는 파티가 끊이지 않았고 타고난 호스테스(파티의 여주인)
인 그의 부인의 내조(사실 예민한 미남형인 아키오는 한량기질도 있어서 부인의 속을 많이
썩였다죠), 그리고 완전히 소화한 서구적 매너로 동양에서 온 젊은 사업가는 키신져, 록펠러
등을 비롯한 미국의 유력인사들을 매료시킵니다.(물론 돈도 썼겠죠) 그러나 그는 일본주식
회사의 행동대원이라는 자의식을 잃지 않았고 그 유명한 미본토에서의 대전 후 최초의 일장기
를 소니의 정문에 (처음부터) 달도록 하죠.

그가 미국 상류사회에 순조로이 진입했던 것은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그의 귀족의식,
명가의 당주라는 자존심과 어우러진 몸에 밴 매너가 물론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만 그것만으
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가 미국인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하고
또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궤뚫고 있었기 때문이었
는데 저는 그 원인이 그가 전공했던 순수과학의 트레이닝 덕분이 크다고 봅니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일단 미국인들도 혀를 내두릅니다. 거기에다 물리학은 특이하게도
서구인들의 사고의 전개방식을 자연스레 접하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물리학을 공부했던 많은
선배세대들이 유학을 가서는 잘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있을겁니다.)
소니가 이후 내부의 문화적 갈등을 모범적으로 극복한데는, 순수과학이라는 다리가 이어준
보편성에 일찍 접해왔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허나 이러한 것만이 아니라 아키
오는 대단한 노력가였고(영어학습에 대한 열정적 일화나-이는 이부카도 평생 그랬는데) 또
자신이 소니를 대표하고 소니는 일본을 대표한다. 그리고 소니는 절대 싸구려 브랜드가 될 수
없으며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귀족적 경영관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자신과, 소니에 대해서 정말 대단한 자부심의 소유자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싼
납품가를 원하는 거래처는 애초에 거절하고 최고 품질의 백화점만을 공략하는 일종의 고급
마케팅을 고집했는데 이것이 "아직 우리는 소니만큼 고가로 팔리지 못한다"고 자학하는게 별
의미가 없는 이유입니다. 왜냐면, 사실 현존 일본 가전업체중에서도 후발인 소니가 오늘날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러한 높은 목표를 대담하게도 처음부터 일관되게 고집해왔기 때문
이니까요.(OEM을 한번도 하지 않았음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이후 이야기는 되도록 짧게 하겠습니다. 소니는 잘 알려졌듯 베타맥스에
있어 처음으로 소수파의 무력함을 경험하나 CD 기술에 있어서는 재빨리 필립스와 손을 잡고
실용화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물론 CD 기술도 물리학자 케시미어를 소장으로 하는 필립스
연구소의 창조품이었고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소니같은 격이 낮은 업체와는 께름칙하다"
는 필립스의 무시를 견디며(불리한 조건으로) 합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데이가 회장으로 취임하고 첫 미주지사의 외국인 사장을 앉히면서 쉽지는 않았던 진정한
국제화의 길로 갑니다.

소니의 역사를 일괄하면서 여러분은 제가 말했던 소니가 삼성보다 좋은 여건이었다는 점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셨나요? 풍부한 자금지원때문에? 이미 앞서 있던 일본의 과학기술 저변
으로? 네 그것들도 모두 맞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우리보다 훨씬 유리했던 그들의 상황입니다. (한 회사만을 드는 것이)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나
과연 이부카의 아버지가 좋은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부카도 한낱(아마 당시의
한국이라면, 아니 지금도 역시) 엔지니어라 무시받지 않고 유력가의 사위가 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든든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보증이 가능했을까요? 아키오가 순수과학도의 길을 가려
했던 것을 그의 아버지가 막았더라면 소니가 그리고 일본이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위상을 대외에
쌓을 수 있었을까요? 이데이를 가르친 그 은퇴엔지니어가 엔지니어는 별볼일 없으니 다른걸
하라고 가르쳤다면? 더 거슬러 올라가 의사나 관료를 하라는 집안의 성화를 받아 그 길을 택하지
않아 이데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니의 감성과 고객중시태도가 이만 했을까요?

제가 자주 묻는 말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왜 일제시대때 우리나라는 과학자,공학자들을
배출하지 못 했는지 말이죠. 일본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막아서? 그런 여건을 조성하지 않았
으므로? 천만의 말씀.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습니다. 똑같았다고 말이죠.. 그때도 지금처럼 모두
판사,검사,의사를 시키려했지 과학자,공학자를 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 상황은 그때보다는 나은데도 오늘에 반복되고 있고요)

허나 삼성은 이런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으로 오늘을 이룩했습니다. 삼성이
자금력이 있었다고 하나 소니만큼은 아니었고 오늘도 반복되는, "일본을 따라 잡겠다니 웃기
고 있군"식의 조소내지 조금 잘 되면 깎아내리는 내부의 비협조자들에 계속해서 직면해왔던
것입니다. 부탁드리는데, 우리중 누가 잘 되면 제발 깎아내리지 맙시다. 누가 잘 된다고 해서
꼭 내것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시샘하는 마음입니까?
구한말 외국인들이 지적하듯, 착하지만 시샘과 질투심이 강한 한국인의 모습이 변함없는 것
입니까?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말들. 그것들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아닙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여러분 개개인에게 드리는 말입니다.

당신은 과연, 아무 물욕없이 이부카와 아키오를 따른 7인의 엔지니어들과 같은 진정한 기술에
대한 애정과 천직의식이 있으십니까?
당신은 기술자의 천국을 건설한다는 이상을 향한 열정과,노력의 보상을 신뢰하고 경영 마인드
도 존중하던 이부카와 같은 공학도이십니까?
당신은 과학이 준 보편적 지식과 시야를 체화하고 애국심과 대의를 따르며 엔지니어들을
존중한 아키오와 같은 과학도이십니까?
그리고 그들의 창립이상의 반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마 "그때 과학기술자들이 양성되었다면 더 나았을텐데"라고 아쉬워 할
당신이 일제시대때 자식을 두었다면 그들과 똑같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우리가 그토록 증오해 온 일본은, 우리 선조로부터 구걸하듯 문물을 배웠던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출발하여 저만치에 가 있습니다. 삼성이 소니를 곧 외형적으로 능가한다해도 결코 그들을
진정 이겼다고 기뻐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이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얼마나 모래위의 지은 성과 같은 것인지...
과연 우리가 일본에 대한 적개심외의 무엇을 동인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반성해 볼 시점입
니다. 그것이 옅어진 다음이 나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에 가까운 엔지니어들의 혹사로
쌓아올린 성과가 그들이 더 나은 목표와 동기로 도약하지 못함으로 인해 유출되고 나라를 등
지는 엔지니어들이 양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선, 외부에 원인을 돌리지 않고 순전히 자신에게 원인을 두는것으
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주변을 탓하기 전에 우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경솔하고 과격한 실력행사로 돌이킬 수 없는-의사들이 반면교사가 된-국민
들의 싸늘한 시선을 당장의 이익과 맞바꾸는 생각은 잠시 묻어두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언제 또 바뀔 지 모르는 세상에서 당장의 상황이 열악하다고 해서 주변사람들에게
천직을 폄하하지 마십시요. 저 역시 열악한 상황을 알고 있지만 제 주변의 조카와 친척동생들을
이공대로 보내도록 세뇌해왔습니다. 그들이 결국 자신의 전공대로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망은 받지 않을것이라 자신합니다.

강조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더 인내하고 조금씩 더 헌신하지 않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상황,
앞날이 안 보이는 민족의 운명은 미래에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돈 이외의 가치가 무시되고, 그리고 과학을 잘못 해석한 맑시즘이 남긴 영악하고 투쟁
하는 인간관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인해 이상이나 꿈을 옛것인 양 망각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
입니다. (사실 과학기술자들이야말로 가장 늦게 물드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너무 불행한 곳이고 정작 과학을 비난하는 호사가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유물이 되어버리는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만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시간속에서, 세상의 중요한 변화를 이끄는 하나의 톱니바퀴라는
보람은 왜 느끼지 못합니까. 돈은 먹고 살 만큼 있으면 됩니다. 지금 당장 돈을 택해 실력행사를
했다가는 정말로 영영 과학기술자들은 한국에서 2류집단에 머무르게 될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돈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압니다. 무시받는 시선이 참기 힘든 것
이라고요. 맞습니다. 사실은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가 하는 방식이듯) 한번에
하나씩. 일단은 어느 하나만을 택해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돈과 존경 그
둘을 함께 쫓는 것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존경을 못 받을바에야 돈으로라도
보상받자는 생각은 잠시 묻어둡시다. 

일단은 우리 스스로가 고쳐야 할 점이 너무 많이 눈에 띄고 또 먼저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지극히 건방지게도 답답하다고 절규했던 또 이 글을 쓴 이유입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
면서.

  • 관전평 () IP :

      좋은 글 읽었습니다.  왜 일본 회사들의 창업기는 다들 소설과 같은 부분이 있는 지...  문화의 차이일까요?

  • tigerim () IP :

      긴글 잘 읽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이공인 스스로 반성하고 자각하며 내공을 키운 후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민들도 그렇게 했을 때 이공인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다만, 국민의 다수가 이공인(기능인+단순기술자+생산직근로자+이공계 대졸회사원+이공계 연구원+이공계 교수+이공계 관료 등)인 현 상황에서,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은 전혀 무익한 일입니다. 이공인들도 다른 직업집단처럼 다같이 중요한 우리 사회의 일원입니다. 우리사회의 주인인 것이죠.

  • 과학도 () IP :

      그렇지는 않습니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받아들이신건 아니시겠죠?) 무엇을 하게되건-설사 과학기술에 몸담지 않는다고해도- 과학기술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일조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살자는 뜻입니다.

  • 이공계2 () IP :

      문득 우리나라의 상황이 생각이 나는군요..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기본적으로 되어있는 귀족적 기업오너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소유는 기업오너, 경영은 전문가가 하는 세상이 왔으면 합니다. 미국의 스타 경영자들처럼요. 주로 경영자들이 과학기술자들이지요. 그리고 귀족적인 바탕의 배우자와 과학기술자 결혼은 우리나라 현상황에서는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사실 이런 혼인케이스가 좀 있어도, 과학기술자들이 알게 되는 정보는 엄청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에 대한 센스를 키울수 있는데..

  • 이공계2 () IP :

      제가 들어봤다는 케이스를 모두 기억해보아도, 경제학과는 보낼망정, 자연대, 공대는 보내지 않고 혼인도 드믑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상류층에서 자연대, 공대를 보내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이며, 서울의 경우 잘산다는 동네의 학생들은 이미 80년대중반에도 의대, 법대를  s대를 갈수 있어도 소신지원(?)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다소 부유하지 않은 동네에 살았던 저는 그런 진학 패턴을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지만요..

  • 이공계2 () IP :

      기억들 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공계 기피 기사가 나갔을때, 모든 언론은 이제 학생들이 소신지원한다고 대서특필 했었습니다. 간판은 버리고 실리를 찾는다는 것이지요..

  • 이공계2 () IP :

      technically 어떻게 중상류의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과학기술자로 만들어도 안심할수 있을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같습니다.

  • 과학도 () IP :

      네 그 문제 참 어렵습니다. 아이가 원체 막무가내로 이과를 가서 과학기술자를 한다고 하면 말릴 수는 없을겁니다만.

  • 과학도 () IP :

      그리고 위의 글이 귀족적 경영 자체를 찬양한 것은 아닙니다. 아시죠?

  • 이공계2 () IP :

      예에 알고 말고요.. 잠시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자들이 혹은 유학나와서도 결혼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생각이 더 나서 적어보았습니다.^^

  • 기초학문위기 () IP :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 글들을 보면서, 주위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참 힘드네요...

  • 김뚜껑 () IP :

      글쎄요.저도,대덕 연구원님의 글을 읽으면서,공대로 오게 된걸 후회한적도 있었지만,그래도 이길로 제길인것 같던데요.제가,진로를 선택할때,생각했던 부분은 선택할수 있는 자유와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는것이었는데,(물론,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아니지만) 원래 엔지니어는 노력한만큼 댓가를 받고,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봅니다.우리나라에서 그걸 채워주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시는것 또한 나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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