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보고서 공장,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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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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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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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ewincom.hanafos.com/polemic_column/p_column.htm?action=view&no=1147&id=hyg8692

 허 영 구 - 연구보고서 공장,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실상

최근 어느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주간 업무보고에서 원장은 용역과제의 질적 향상을 지시 및 당부했다 한다. 과제를 많이 하면서 질도 높아지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그래서 질 높은 연구진들에게 계속 용역과제가 들어오면 용역 수입이 늘어나 예산이 풍족하게 된다. 임금도 많이 오를 테고 예산 따려고 정부에 아쉬운 소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양이 늘어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 아닌가? 가정이 필요한 이론이지만 수확체감의 법칙이라 불린다. 그런데 연구원은 지금 수확체증법칙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IT산업을 중심으로 거론되는 사이버상의 무한한 정보생산과 끝없는 유통 및 저장이라는 수확체증법칙에 기초할 때 그럴듯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주말도 없고 주야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으면 주어진 일정에 따라 어떤 보고서도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 하에서 기계처럼 작동한다. 찰리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보듯이 일관된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이제 생산직 공장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연구하는 노동자도 보고서 생산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불량률이 높아갈 뿐 대량생산체체는 이제 완벽하다.

정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안정적으로 연구예산을 확보함으로써 기초연구를 비롯해서 장기적인 정책과제에 이르기까지 연구업무를 수행하게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장 필요한 연구도 해야 하지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국가나 사회적으로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는 싱크탱크역할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연구원은 어떤 모습인가?

그러나 출연연구기관이 국가나 국민의 연구기관이 아니라 권력담당자들의 의도와 비위를 맞추는 시녀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출연연구기관 본래의 취지는 매우 빛이 바래고 있다. 거기다 출연연구기관의 필요성이 옛날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한 정부는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처럼 예산조차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면서 연구의 질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예산을 자체적으로 충당하기 위해서 수탁용역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석, 박사들이 하는 보따리 장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시간강사들에게 붙인 이름인데 이제는 정부출연기관 연구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영업사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용역발주처가 원하는 방향의 보고서를 생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애당초 용역보고서에서 질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자체과제에다 엄청난 용역과제를 덧씌운 채 그 보고서를 놓고 질을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안다. 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에 따르면 쇳덩이도 너무 많은 운동을 하면 피로가 온다고 한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섬세한 생물체인  인간이야 말해서 뭣하겠는가? 크고 작은 또는 장.단기 보고서를 통 털어 자신의 보고서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질을 높이는 초인적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임금 및 고용구조가 유연화된 상황에서는 경영자들의 이러한 경영방침은 연구자들의 심신을 갉아먹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관철되고 있다. 기존의 임금체계가 성과, 연봉제로 전환되면서 평가시스템은 통제구조를 강화하게 되었고 동료들간의 경쟁을 촉발시켰다. 일단은 양을 소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객관적 평가기준에서 양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때의 식량증산에 유용했던 통일벼가 생각난다.

연구원은 용역과제에 질을 높이라고 다그치기보다는 연구의 질을 높이는 시스템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연구자 스스로도 용역과제수가 많고 그것을 토대로 여기저기 많은 글을 쓰고 그래서 연구평가가 좋아서 평점도 많이 받고 연봉도 높아지는 달콤함에 빠져 장기적으로 질 높은 연구를 위한 진짜 연구를 놓치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한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가 늘어나는 대가로 인상되는 임금이나 연봉은 진전한 처우개선이나 임금인상이 아니다. 사실 지금 연구원들의 예전의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을 감안하면 임금은 계속 정체 또는 하락하고 있다.

질을 높일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이 분명한 데도 질을 높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투입 없는 산출이 이뤄진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물론 컴퓨터와 종이는 계속 투입되고 보고서는 만들어진다. 연구자들에게 진정으로 투입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잘 안다. 구 한말 한 시대의 풍미했던 혁명가(그에게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 명칭을 붙일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600여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하나같이 훌륭한 책이다.

그 분이 얼마나 많은 투입(공부)을 했겠는가? 인류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성경'책이고 그 다음으로 두 번째는 '자본론'이라 하는데 그 책의 저자 마르크스는 잘 납득되지는 않지만 약 2만 권의 책을 일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했다는 책 수에도 미치는 못하는 책을 읽고 그 보다 더 많은 보고서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인가? 그러고도 그 곳에서 질을 운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초능력에 가까운가? 축구 응원 팀에 붙은 일본의 '울트라 닛뽄'을 훨씬 능가하는 한국의 '붉은 악마'일 테다.

이미 대부분의 연구기관들에서 연구원들의 창의성과 전문성을 확대하면서 연구의 질을 높여 나가는 연구시스템이 붕괴되었다. 한국의 금메달 따기 식의 단기적인 엘리트 스포츠로 국민체육이나 생활체육이 무너진 것과 같은 꼴이다. 이제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없다면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책임질 기관장조차 이사회가 평가하는 그 엉터리 같은 기준에 의해 원장들의 임금조차도 차별화시키는 구조에 묶여 있으니 변화를 위한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구조가 지속되거나 강화된다면 희망은 없다. 이 글은 연구자들의 노력을 폄하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연구자들의 현재의 노력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노력을 가두고 있는 질곡을 지적함이다.
  • 이승철 ()

      허영구씨가 민주노동당의 그 허영구씨인가요?
    지금의 문제를 비교적 정확히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안이 부족하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순 있겠지만 적어도 문제자체를 이해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군요.

  • 사색자 ()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모모 사이트에서 다시 글을 퍼옵니다. "도대체 맨날 문제제기만 하지 뭐 어떻게 하자는 말은 왜 없는거야? 이래서 안돼..." 라는 일전에 나온 B님의 말에 또다른 분이 아래와 같은 말을 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거려진다는...


    ***
    (2004-07-18 22:09:02)
    허영구씨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허영구씨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하자면.. ^^

    허영구씨는 민주노총 출신 노동운동가 입니다. 초기 민노총 조직 구성의 실질을 담당하던 분이지요.. 정책을 주로 담당하는 분이고요.. 부위원장까지 했던 기억이 나는데.. 노동운동하는 분중 정책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를 하는 분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정책부분을 집중 연구하는 노동운동가 출신들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나가서 '투쟁'을 통하는 것이 훨씬 더 빨랐기에 그런 영향도 있고.. 늘 구속과 수배생활로 인해 어디 한군데 앉아서 연구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클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노동운동가 출신들은 참 대단한 분들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번 세미나에서 그 분이 하는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쉬운점은.. 많은 경우 그분의 발표는 '문제제기'로만 끝이 난다는데 있지만.. 몇번.. 노동 정책이라든가 노동법.. 뭐 이런 세미나나 공청회에 참석하다보면 허영구씨가 왜 항상 '문제제기'의 수준으로만 발표를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런 종류의 세미나나 공청회에 나오는 분들은 대부분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기본적인 시각들의 '상당'한 차이로 인하여 다른 발표자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커녕 그 단점만 찾아내려는데 혈안이 된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진보누리에 올라온 글 또한.. 그런 원론적인 '문제제기'를 벗어나지 않는 글일 뿐 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문제제기들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는데.. 근본 문제가 있기에 꾸준히 허영구씨는 그런 글들을 씁니다.. 물론 한편으로 그 분은 정책에 대한 연구와 발표도 끊임없이 하고 있지요. 하영구씨의 '문제제기'성 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는 부분은 각자의 반성위에 좀더 솔직하고 적극적인 토론을 하자 뭐 이런 취지인게지요. 이미 그런 문제제기를 충분히 알고 또 그 해결책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던지는 글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허영구씨의 연구물들은 인터넷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

  • 이승철 ()

      흠 그렇군요.
    요즘 들어 상황이 하도 비관적인지라 어떤 정치세력이 이공계 기피나 과기인 처우개선에 대해 합리적인 대안만 내놓으면 다른 비판 내용은 모두 눈 감아주고 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의석수 기준 ^^) 상관없이 과학기술계의 문제를 풀어 줄 의지와 비젼이 있다면 거기에 밀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조선일보나 한겨레 신문 모두에서 이런 기사가 안난다는 것 자체가 비관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치싸움이나 경제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미래를 대비해야 할 일에는 정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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