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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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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 작성일2005-04-0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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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학술적인 글이 아닌 대중지향의 글이며 글쓴이 개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임을 재차 삼차 밝힙니다.)


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4) : 혁신이론과 정책의 발전


혁신(innovation)이란 무엇인가? 혁신 구호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정작 '혁신이 뭡니까?' 라는 물음에 제대로(또는 소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혁신이란 한자어의 뜻 그대로 무언가를 고치거나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하다. '변화'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의미이고 '개선'보다도 더 폭이 크고 의지가 넘치는 어감이며, '개혁'보다는 덜 라디칼하고 누구나 바람직하다고 느끼는 어감이다. 말하자면 "뭐가 되든, 좋게 바꾸는 것. 그런데 그 정도가 쫌 크고 파격적인 변화" 를 뜻하는가보다. 엊그제 현대자동차의 소나타 광고 문구를 봤더니 "변화와 혁신의 차이" 운운하고 있던데, 우리나라에서 혁신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를 대략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innovation이라는 개념을 오래 전부터 정립해 온 서양 애들의 경우, 각종 논문이나 저술에서 읽혀지는 혁신(영어 innovation의 정확한 대응어가 혁신이라는 가정하에)의 의미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범위이다. 혁신은 지식의 질이 높아지고 양이 늘어나는 것이며,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경제성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조금 더 넓게 잡아도 협의의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조직(organization)과 제도(institution)의 개선을 포함한다. 아무 것이나 좋게 바꾸었다고 혁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용도의 범위'를 결정짓는 요소 중에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도 있겠으나 학자와 일반인, 정책가와 정치가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후자들이 보통 혁신이라는 말을 매우 폭넓게 사용하곤 한다. 필자는 가끔 혁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돈 되는 것. 또는 돈 되는 것을 도와주는 것" 이라고 장난스레 말하곤 한다.

'혁신'이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바로 혁신이론의 원조(또는 혁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해서다. 그는 1912년 '경제발전의 이론'이라는 저서와 1928년 '자본주의의 불안정성' 이라는 논문을 통해 경제성장의 외적 동인으로서 혁신, 금융(여신), 기업가 정신을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해야 하겠다. 경제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즉 규모가 커진다. 그렇다면 왜 경제규모가 커지는 것일까? 18세기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인구 증가에 따른 경제활동의 증가"로 설명하였다. 그 유명한 맬서스의 '인구론(1798)'은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의 위험을 경고하여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즉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술은 대체가능한 것으로, 신기술이 구기술을 대체하는 것만으로 경제규모의 확대가 이루어질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기술이 단위시간당 2배의 생산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종래의 기술을 이용하여 더 많은 설비와 노동력을 투자해 2배 많이 생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심지어 차라리 후자가 더 많은 고용과 투자를 창출하므로 경제발전에 이익이 된다는 의견도 많았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균형(equilibrium)은 안정한 상태이며 시장은 균형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인다.(역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경제성장과 균형에 대한 고전파의 시각은 19세기와 20세기초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슘페터는 균형이 새로운 균형으로 이동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고, 따라서 경제는 동태적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균형으로 이동시키는 외적 동인으로서 기술혁신을 들었는데, 혁신을 가능케 하는 기업가정신과 기업활동을 가능케하는 금융기관의 여신을 들었고, 혁신적인 기술(또는 제도)를 도입함에 따른 기존 체계(또는 기술)의 '창조적 파괴'가 경기순환을 일으키는 원천이라고 보았다. 슘페터는 공직에도 깊이 참여했던 인물인데, 그의 파격적인 이론은 오히려 사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혁신이론의 원조로 추앙되고 있다. 즉, 기술혁신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임을을 제기한 최초의 경제학자인 것이다.

다만, 널리 알려지기로는 기술혁신 보다도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경영학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면서 강조되어 왔기에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의 관계를 말한 원조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슘페터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혁신의 경제학을 발전시켜왔으나, 이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향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방향이었으며, '진화주의 경제학'으로 불리는 줄기를 낳았다. 콜럼비아 대학의 넬슨(Nelson)이 이끄는 진화론적 경제학파는 생물학에서의 진화론의 개념을 경제학에 접목시켜 혁신과 경제발전의 동학(dynamics)를 설명하려 노력하였다.(넬슨의 초기 저작들을 보면 심지어 생물학적 진화론의 이해가 필수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용어와 개념을 차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혁신의 역량이 어떻게 증진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현 시점에서 미국과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하는 진화 경제학은 혁신체제론과 '따로 또 같이' 공생하는 관계로 보이는데, 이는 영국과 북유럽에서 발생한 혁신체제론(innovation system theory)이 진화경제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나 진화경제학과 꽤 다른 면을 보이며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혁신체제론에 다다랐는데, 이에 대한 본격적인 언급은 다시 약간 뒤로 미루고, 혁신정책의 발전단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근대적 개념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유럽에서의 일이다. 그것은 부호나 세력가가 과학자를 후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연구개발체계가 한 사람의 뛰어난 과학자 중심에서 연구개발 시스템으로 진화하면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체계 역시 함께 발전하였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과학기술이 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정부연구기관과 국가연구개발프로젝트가 생긴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공산진영과 자본주의진영사이에 체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독려하였다. 과학기술정책 또는 기술혁신정책이 독립된 하나의 정책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이다.

이전의 혁신정책은 미시경제정책의 한 부분으로서 주로 원로 과학자나 과학계의 대가들의 조언과 자문에 의존하여 결정되었으며, 혁신정책 전문가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단계를 혁신정책의 1단계 또는 1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거대과학 프로젝트와 스핀오프 패러다임(spin-off paradigm)으로 대표되는 시기이다.(거대과학 프로젝트란 아폴로 계획으로 대표되는 미소 양국의 우주개발 경쟁이며, 거대 입자 가속기 건설 경쟁 등을 말한다) 이 시기의 혁신정책은 거대과학, 순수과학에 대한 맹목적 투자가 결국 과학적 성취로 이어지고, 이것이 자연적으로 기술의 진보와 혁신으로 이어져 상품으로 이어진다는 1차원적 선형모델에 기반하였는데, 이러한 사고를 스핀오프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1단계 혁신정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으로 기술 진보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는 시장 자율에 맡겨 둘 경우 효과적이고 목적지향적인 기술 진보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소위 ‘시장 실패’(market failure)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거대과학에 예산을 쏟아 붓고, 국가적 연구개발 과제와 로드맵을 설정하고 전체적인 예산의 조정과 배분을 함으로써 기술혁신을 이끌어 나단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시각은 정부, 즉 관료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데 그 근거로는 정부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시장 참여자들의 그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선진국에서 1세대 기술혁신정책은 대체로 1990년을 기점으로 2세대로 변모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시장실패론과 정부 역할의 중요성은 여전히 기술정책의 근본 철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술 개발에 국가 정책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천적 당위성을 지지하고 있다. 1990년대 유럽쪽에서 시작된 2단계 기술혁신정책은 과학기술 활동에 대한 투자 효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제성장을 과학기술활동의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 연구개발투자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계산하기 시작했고, GDP성장과 생산성 증가에 대한 연구개발투자의 기여도를 구체적으로 따지기 시작하였다.

1세대 기술혁신정책이 체제 우월성 선전을 위해 거대과학에 맹목적으로 투자했다면, 2세대 기술혁신정책에 이르러서는 거대과학의 투자가 경제성장과 국민의 삶의 질에 어떠한 긍정적 효과를 미치는지 보일 것을 요구하였다. 대규모의 우주개발계획과 거대 입자가속기 계획, 핵융합로 개발 계획 등 수십년간 이어져 온 프로젝트들에 대한 예산이 대폭 삭감되거나 백지화되었다. 1세대 기술혁신정책의 전통이 매우 강하고 과학기술이 국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미국의 경우에는 아직 거대과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유럽의 경우 유럽통합의 조류와 맞물려 대부분의 거대과학 프로젝트들이 다수의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공동과제 형식을 띠고 있다.

2세대 혁신정책의 특징은 경제학자, 정책분석가들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체계를 구축하였다. 1세대의 선형성을 극복하고 연구에서 상업화 과정에 이르는 수많은 피드백을 강조하며, 여러 혁신주체들의 상호작용적 학습을 통해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여겨지고 있다. 2세대 혁신정책은 현재 진행중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참여정부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기의 혁신정책의 특징은 혁신 시스템(innovation system)을 강조하여 본격적인 혁신체제론이 전개되며, 정부의 역할은 혁신 주체간의 네트워킹과 혁신 인프라의 구축이라는 시각이다.(어떤 학자는 스핀오프 패러다임의 시기를 1세대, 시장실패와 정부의 과기정책에의 적극적인 개입을 2세대로 구분하여 혁신체제론을 3세대로 다루기도 한다) 또한 ‘혁신’이라는 용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특징이라 하겠다.

사회적 성격이 강한 시장경제를 영위하는 북유럽에서 강소국 또는 강중국에 알맞은 혁신정책으로서 3세대 혁신정책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산출하는 경제적 ․ 사회적 효과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정보통신기술, 신소재기술, 생명공학기술 등과 같은 신기술패러다임의 등장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적 ․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였다.(송위진, STEPI 정책자료, 2004)

세계 각국에서 아직 2세대 혁신정책의 의의는 충분히 존재하나, 2세대 혁신정책만으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혁신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혁신과 다른 정책영역과의 관계, 혁신과 정책결정과정과의 관계 등에서 다양한 법․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며, 각 정책영역에서 혁신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정부에서 ‘참여’를 전면에 내세운 2003년부터(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참여’는 3세대 혁신정책의 주요 정신요소이기도 하다), 유난히 혁신, 시스템, 네트워크, 클러스터링 등의 용어들이 회자되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혁신체제론은 기술혁신의 핵심적 주체인 기업만이 아니라 대학, 연구소, 업계단체 등과 같은 공공조직들의 혁신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부의 혁신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혁신은 혁신체제(innovation system)의 작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다시 말하면 혁신체제는 혁신을 창출하는 시스템으로, 종속변수인 혁신의 방향과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로서의 역할을 한다.

혁신체제론에 의하면 정부의 역할은 혁신체제를 잘 갖추어 나가서 대학, 연구소, 기업 또는 나아가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혁신 주체들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그 역량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며, 혁신주체들간의 상호작용이 원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 때 모든 주체들의 판단은 완벽히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시장실패에 대한 정부개입을 정당화한 1세대 혁신정책과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중 하나인데, 시장에서 정부는 전지전능하거나 항상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가 혁신의 대상이자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혁신이 주로 개별 혁신주체(예를 들어 기업) 단독으로 수행되기보다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른 조직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되므로, 기술 발전의 원동력 또는 원인을 ‘기술압박’(technology push)이나 ‘수요견인모델’(demand pull)에서 찾는 일차원적 모델(linear model)은 혁신체제론에서는 구시대의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기술압박 모델이란 과학에 대한 투자가 기술을 만들고 그 기술을 사용할 곳을 찾아 상품이 만들어진다는 모델로, 경영학적으로 보자면 기업이 소비자를 선도하는 형태에 알맞은 시각이다. 반대로 수요견인 모델은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필요한 기술이 개발된다는 이론이다. 두 모델 사이에 방향과 선후의 차이가 있으나 시장과 기술 사이가 단선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러나 혁신체제론적 관점에서는 기업과 소비자는 물론이거니와 기업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 또는 연구소,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시장에서 제품을 표준화하거나 규제하는 정부 등 모든 주체가 상호작용하면서 기술의 진보와 상품화, 곧 혁신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파급효과가 매우 큰 기술이 개발되거나(예를 들어 인터넷, CDMA등) 시장 상황이 크게 변하면(예를 들어 한일 FTA체결, 중국의 맹추격, 이공계 기피현상 등) 기존의 경제시스템이 변화된 상황에 맞게 재빨리 진화해야 할 것이다. 혁신체제론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혁신능력(innovating capability)’이라 하며 경제시스템의 진화와 성과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혁신능력은 각각의 주체의 혁신역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혁신체제의 능력이며 나아가 국가의 능력이다. 국가혁신체제(National innovation system, NIS)란 국가를 혁신하기 위한 체제(innovation system for the nation)가 아니라, '국가적 혁신체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역혁신체제(Regional innovation system, RIS)는 국가혁신체제를 구성하는 지리적 구분에 의한 일부분이며 산업혁신체제(Sectoral innovation system, SIS)는 산업(기업)을 지원하여 혁신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 및 민간부문의 기관 및 제도간 네트워크를 말한다.(박준구, 한국산업기술재단, 2004)
   
그렇다면 2세대 혁신정책,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3세대 혁신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정부와 기술혁신정책의 역할은 무엇인가? 현실로 눈을 돌려 볼 때 지금 우리나라가 어느 단계의 혁신정책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실효적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고, 여기서 다루는 것이 부적절하기도 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세계적 경향과 우리나라 정부정책의 기조 변화 등이 연구개발과 혁신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데도 불구하고 아직 일선 연구개발자나 기업가, 심지어 일부 정부 관료에게도 혁신체제론은 생소하기 그지없어서 많은 혁신체제 참여자들이 아직도 1세대 혁신정책 즉 단선적 모델을 신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과학기술정책의 고위층이나 정책 엘리트집단에서는 이미 2세대를 넘어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등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까지 요구되는 3세대를 추구하는 동향도 있어 사실상 2.5세대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혁신정책의 브레인이라 할만한 정책 전문가 그룹과 연구개발 일선의 괴리는 심각한 수준으로 시급히 그 격차를 좁혀 나가야 한다. 한쪽에서는 왜 새로운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느냐고 탓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소한 정책개념을 들고 나와 이상한 주문만 하니 과연 당신들이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이냐고 반문하는 볼썽사나운 모양새가 벌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물론, 국가별로 상황이 다르고 특성이 있으므로 세계적 추세나 경향과는 무관하게 우리에게 맞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동구권 국가나 인도 등은 기초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스핀오프 패러다임이 여전히 공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험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중국의 경우 시장실패를 적극적으로 조정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는 1~1.5세대 혁신정책이 알맞다고 할 것이다. 선진국에서 이미 ‘유행 지난 이벤트’로 치부되는 유인 우주선 발사 등 거대과학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도 자국민들에게 경제성장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려는 일종의 체제 우월성 과시적 성격이었다. 훨씬 앞선 우주기술을 보유한 일본은 중국의 유인 우주선 발사에 냉소적인 분위기였고 앞으로 유인 우주선 개발 및 발사 계획이 없음을 밝혔는데, 우리나라는 중국의 추격이 무서운 기세라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취급하고 외국 우주선에라도 한국인을 실어 보내자는 우주인 프로젝트가 논의되고 있으니 재미있는 시각차를 보이는 예라고 하겠다.

시장실패론적 시각으로 보자면, 연구개발활동을 통해 창출되는 과학기술지식은 공공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정부의 개입을 통해 연구개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연구개발결과를 독점적으로 소유․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추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반면 혁신체제론에서 시장실패 대신 ‘시스템실패(system failure)'를 극복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파악한다. 시스템실패는 혁신체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혁신의 창출과 확산이 제약되는 것이며 따라서 시스템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촉진시킬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혁신체제론적 접근은 전통적인 시장실패론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문제설정 자체가 시장실패론과 다르기 때문에 주요 기능과 역할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다만, 시장실패론적 접근이라 하여 혁신체제론적 접근에 비해 결코 하등하거나 시대에 뒤진 것이 아니며, 정부정책은 그 본원적 특성상 시장실패에 대한 대응을 존재의미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장에 대한 규제 등 전통적 기술정책의 영역(예를 들어 정보통신 정책)은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낮기 때문에 주로 연구개발정책과 산업정책에서 변화를 적용하거나 감지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혁신체제론의 특징을 요약하고, 최근의 발전과 응용, 정책 사례 등에 대해 다룬다)

댓글 5

김하원님의 댓글

김하원

  혁신체제 하니까 생각나는 것인데, 포도밭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연조건 그대로 포도를 키우면 (물론 정성들여)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포도들이 되는데, 이 포도들로 와인을 만들면 와인의 품질이 '그때그때 다릅'니다. 가끔 그야말로 대박, 명품 와인들이 나오기도 하죠. 그러니까, 가끔 100점짜리가 나오고 50~70점짜리가 대세인 그런 포도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포도 재배를 공정분석하여 합리적으로 배치한 후, 컴퓨터로 제어되는 온실&급수 시스템을 도입하면 그 평균 수준을 단숨에 80~90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대신 품질이 일괄적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100점짜리는 기대하기 힘들죠.

어쩌다 한번 나올 100점짜리를 위해 나머지 쭉정이들을 지고가는 것보다, 항상 80점 이상들을 나오게 하는 토양을 일구는 것이 혁신체제가 아닐까요.

임호랑님의 댓글

임호랑

  이런 글은 참으로 쓰기 어려운데.... 잘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원하는 분들이 있어서 퍼가고 싶습니다.

박상욱님의 댓글

박상욱

  퍼가시는 것 환영입니다. 다만 연재 완료 후 한꺼번에 퍼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부분부분 읽으면 의미가 오독될 수도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면서 이제야 중반부가 시작되려 합니다. 하루 한편씩 올리려 했는데 갑자기 바빠지면서 밀리고 있네요. 예상으로는 8~10편 정도에 끝날 것 같습니다.

임호랑님의 댓글

임호랑

  일단 양해해주신 것으로 알고,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민성호님의 댓글

민성호

  한꺼번에 몰아서 읽으려고 눈과 마음을 아껴두고 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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