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1)

글쓴이
박상욱
등록일
2005-04-05 23:54
조회
4,5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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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건
댓글
5건
최근 '혁신(innovation)'이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전세계적으로 혁신 혁신 혁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혁신이라는 단어가 뜻도 좀 모호하고 그렇다보니 혁신을 논하는 이론이나 정책도 모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남용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죠.

2004년부터 한국 정부도 유럽식 혁신체제론에 바탕을 둔 혁신정책을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씨앗은 그보다 더 전에 뿌려졌겠지요. 혁신본부의 설치나 클러스터의 강조, 대덕 특구, 기술금융 강화조치 등은 가깝거나 조금 덜 가깝거나 모두 혁신정책과 연관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 분야가 워낙 사회적 마이너리티이고, 전문가도 적고 관심 있는 일반 대중도 극히 적다보니 혁신정책과 관련된, 또는 종래의 과학기술정책 이론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거니와 특히 현장 과학기술인들이나 국민들에게 친절히 다가가서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라는 것도 모른 채 우왕좌왕 하고 있는거죠. 그것은 일선의 연구개발자들 뿐만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해당 부처 실무진부터 고위급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으로 보입니다.(또 이분들은 잘 안다고 해도 잘 설명해 주시지는 않더군요) 그냥 선진국에서 하고 있는 유행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서론을 쓰고 있는 것인데,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군요.^^

이 글은 연재물로 구상하고 있는데,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그리고 혁신체제론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제가 어설프게 아는 정도만) 소개를 드리고 또 개인적으로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밝히고자 합니다. 이 글은 학술적인 글이 아니며 대중에게 읽혀지기 위함입니다. 또한 제가 싸이엔지 운영진이기는 하나 싸이엔지의 공식 입장도 아닙니다.(학문분야에 대해 공식입장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체계도 없고 순서도 뒤죽박죽 내키는대로 쓰겠습니다만, 오히려 그런 면이 읽기에 친근하실 것 같아 '썰풀기체'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오류도 있을 수 있고 일부 제 주장은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이미 제목에도 그것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본문은 반말입니다.^^ 그럼 많은 성원과 토론 기대하겠습니다. 무단 전제는 안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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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혁신체제론을 선호하는 이유 (1): 과학기술정책의 실체


과학기술정책(science and technology policy)라는 말은 참 많이 쓰는 말이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한국과학기술인연합,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헉헉..

그렇다.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과학과 기술을 함께 붙여 과학기술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이미 널리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고 나는 그 용어에 아무 불만이 없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이미 따로 생각할 수 없고 경계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기술(technology)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NT와 BT를 물리, 화학이나 생물학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첨단의 기초과학분야는 곧 첨단의 기술분야이며 산업으로 연결되는 데에 약간의 시차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학'이라는 단어에 숭고한 가치를 부여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으며 진정한 의미의 순수과학(pure science)란 매우 좁은 영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초과학과 순수과학이 용도폐기되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국부창출로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고해서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될 것이다.(혹자는 기초과학의 위기를 인문학의 위기와 결부시켜 이공계 위기를 배금주의의 산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의견이라고 감히 말하겠다)

여하튼, 한 단어로 합쳐져버린 '과학기술'이란 용어가 실효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에 대한 정책을 과학기술정책이라 말하는 것은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과학기술정책은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 즉 과학기술을 융성하게 하고 또한 과학기술을 이용한 산업에 대한 정책이라 대강 정의할 수 있겠다. 사회와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거나 하는 몇몇 추가적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자, 그렇다면, 과학기술정책이라는 독립된 분야가 학문적으로 존재할 것인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답은 '아니오' 이다. 아니 이게 뭔 소리람. 그럼 과학기술정책이라는 분야도 없이 과학기술부가 일을 하고,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주요한 정책을 정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는 몇년 전 독학으로라도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것을 공부해 보고자 마음먹고, 관련된 서적부터 뒤져보기 시작했다. 앗.. 없었다. 국내 도서로는 '과학정책'이라는 책이 있었고, 해외 도서로도 정확히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라는 맘에 드는 제목을 가진 책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이 놀라운 사건은 필자의 무식함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며 나중에는 별로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기술정책이라는 정책 분야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정책이라는 학문분야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찾아 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학기술정책은 학문분야가 되기에는 너무나 넓은 관심사를 포함하는 관계로, 각종 다른 이름들로 분리되어 발전해 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일반적으로 대중들이나 연구개발자들에게 "뭐야, 그거 다 그게 그거고 똑같은 것들 아냐?"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소수의 연구자들로부터밖에는 관심조차 끌고 있지 못함을 발견했다.

국내 유일의 모 과학기술정책 전문 연구원에 가서 수십명의 박사급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여기서 과학기술정책 전공하신 부운~~?" 하고 소리쳐 외치면 두세명 정도가 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는 곳이라고 해서 과학기술정책 전공자가 많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기정책의 복잡하고 다양하고 폭이 넓은 성질 탓에, 매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있는 것이 진정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과학기술정책이라는 학문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박사들은 대개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이학, 공학, 과학학을 전공한 분들이 대다수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세명의 '과학기술정책인데요~' 라고 답한 분들은 간판에 '과학기술정책'이라고 쓰여 있는 외국 학위과정에서 공부한 분들일 것이다. 그런데, 외국의 유수한 선진 과학기술정책 대학원과정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용을 보면 역시 '과학기술정책'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과학기술정책에 응용될 수 있는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혁신이론을 가르치는 것이다. 재차 말하면, 외국에도 과학기술정책이라는 학문 분야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명확히 말하자면 과기정책은 애시당초 독립된 학문의 분야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더 작은 학분 분야들이 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현재까지 과학기술정책을 구성해 온, 그리고 과학기술정책이라는 추상적인 분야와 항상 혼동되어 온, 기술정책, 기술경제학, 기술경영, 산업정책, 과학기술행정학, 과학정책 등의 분야(또는 용어)에 대해, 성격과 역할, 배경과 발전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다. 혁신체제이론에 기반한 혁신정책은 별도로 다룰 것이다.

  • Simon ()

      매우 재미있는 서론입니다. 특히 열우당 산자위에 소속되어 나라의 산업기술 및 국부창출에 노심초사하며 금캐러, 석유캐러, 아니면 노다지 캐러 가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을 많은 국회의원님들께서 꼭 읽으셔야할 글이며 특히 의원 보좌관실에서 관심있게 보아야 할 글이군요.

    예를들면, 대통령님의 오른팔로 알려진 젊은 스타 이광재 의원 같은 분.

    산자위에 소속되어 노다지 캐러 갈 궁리만 하지 말고 산업기술 및 과학기술 나아가 관련 정책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익히고 닦기를 간절히 기원. 이론과 실무를 잘 닦을 즈음에는 의원 뱃지를 안 달고 있을랑간 모르겠으나, 며칠전 보내 준 편지에서와 같이 "더욱 더 열심히 하는 그런 국회의원" 되시라고,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재미있는 연재를 기대!!!

  • Will ()

      이런 좋은 글이 100번 읽혔는데 고작 추천수 2개라니 참담할 뿐 입니다.

    어떤 류의 글들은 Hit 수에 비해 추천이 마구 올라가던데.....

     

  • 긍정이 ()

      다음 연재가 기대가 됩니다.

  • 김태억 ()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 최희규 ()

      왠지 제가 전공했던 XX공학의 전개 과정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한국에 유일하게 단 한곳에만 대학원과정이 개설되어있는 제 전공과목은 독립된 분야가 될수 없다는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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