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히 구축해야할 상향식 과학기술 거버넌스 체제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17-09-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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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상향식 과학기술 거버넌스

얼마 전 박기영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과학기술계의 거센 반발에 밀려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스스로 사퇴했다. 이후 내정된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비과학적 이론을 주장하는 한국창조과학회 이사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논란이 되고 있다. 청와대는 “종교 문제”라고 일축했지만, 창조과학은 신앙이 아닌 반과학ㆍ반지성의 범주라는 점에서 결격사유라는 반박이 나온다. 과학기술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들이 과학기술ㆍ벤처 담당 부처의 장ㆍ차관급에 지명되는 것을 보면서 당혹스럽고 모욕적이라고까지 여기는 분위기다. 이미 물러난 분의 황우석 사태 책임 여부 등을 다시 거론하고 싶지는 않으나, 인사 파동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과학기술계를 위해서나 새 정부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사 파동의 책임으로 청와대 인사 시스템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지만, 그보다 과학기술 거버넌스 차원의 문제점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계는 박 본부장의 임명 반대에 오랜만에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것이 있으면 철저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맹자가 얘기하길, 무릇 남이 나를 업신여길 때에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데가 있을 것(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이라 하였다. 과학기술계가 정말 무시당했다면, 왜 하필이면 과학기술계가 그 대상이 되었을까?
새 정부 들어 다른 분야에서는 능력과 덕망을 두루 인정받는 분들이 국민적 환영을 받으며 정부 요직을 맡은 경우가 적지 않다. 피우진 보훈처장의 인사는 큰 감동을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층과의 친분에 크게 의존하여 고위직에 발탁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계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권력이나 권력에 의해 임명된 고위공직자에게 줄을 서는 데에만 급급했던 게 사실이다. 취약하고 후진적인 과학기술 거버넌스 체제를 면하지 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바람직한 거버넌스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단체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과학기술인 개인의 명성을 높이고 입신양명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과학기술계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고 합리적인 과학기술정책 수립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통로로서 정책적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거나 논쟁 중인 현안에 대해, 또 다양한 분야의 정책 수립을 위한 의견수렴 과정에 과학기술인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고 참여에 미온적이었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연구만 하겠다는 많은 과학기술인들의 태도를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의 삶과 동떨어진 연구란 존재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과학기술계에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탁월한 연구개발 역량과 노련한 행정 능력을 겸비한 과학기술인들이 수두룩하고, 과학기술 정책과 국가 비전 수립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런 숨은 인재들이 행정가, 정책가로 성장할 기회를 갖고 중요한 공직에 오를 수 있도록 공적인 소통과 검증 채널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굵직한 사업들이 소수 과학기술자의 입김과 이해관계에 따라 춤을 춰 온 폐단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현장 과학기술인의 요구와 합리적인 의사수렴을 통해서 과학기술계의 중요한 의사결정 및 정책수립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상향식’ 과학기술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과학기술계와 정부 공동의 몫이다. 그 성공 여부가 현 정권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성우ㆍ과학평론가(전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한국일보 201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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