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연구원이 기업의 노예인가 [04.10.25/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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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등록일
2004-10-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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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는 첨단기술의 불법적인 해외 유출을 방지하겠다는 목적으로, 산업자원부가 중심이 되어 이른바 ‘첨단기술 유출의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관련 연구개발 인력들의 전직을 제한하거나 퇴직 후 일정기간 이상 동종업계 취업을 금지하도록 유도하겠다는 방안도 나왔다. ‘때 맞춰서’ 여러 신문에서는 몇가지 산업스파이 사건의 예를 멋대로 들먹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상당수 연구원들이 매국노라도 되는 양 매도하기도 한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국제적인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오늘날, 첨단기술의 불법적인 해외 유출과 그에 따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고심하며 나름의 대책을 세우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 대상과 벌칙을 대폭 확대하고 연구개발 인력 등에 대한 보안과 관리를 강화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관련 방안들은 매우 중대한 문제점과 독소조항들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현장의 과학기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듯한 발상은, 최근 당정이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어떤 악법보다도 헌법에 위배되고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

첨단기술 관련 서류나 설계도면, 디스켓 등을 절취하거나 빼돌리는 행위 등은 물론 비난과 처벌을 받아 마땅하며, 이러한 불법행위들은 형법 등 현행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이 가능하다. 또한 핵심기술 등은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 제도를 통하여 보호받고 있다.


- 전직제한 교각살우의 愚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전직제한 등을 통하여 연구원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까지도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억지일 뿐 아니라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다. 저명 SF 작가인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페이첵’에서는 중요한 연구개발을 수행하던 천재적인 기술자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기밀 유지를 위해 관련 부분의 기억을 완전히 삭제당한다는 섬뜩한 대목이 나온다. 정말 그런 기계가 앞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연구원들의 기억까지도 지워버릴 텐가?

어떤 이들은 선진국에서도 연구원들의 동종업계 전직을 제한하고 있다면서, 마치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상황과 형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물론 단기적인 동종업계 전직 금지 사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불이익을 철저하게 보상해줄 뿐 아니라, 중요 연구 인력들에 대해 재직 중에 적절한 처우와 충분한 인센티브 등을 제공함으로써 이직의 요인을 스스로 사전에 방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부득이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에도 법원은 기업의 영업비밀보다는 연구원의 ‘생존권’을 더 중시하여 판결을 내리는 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상황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지난 8월말 대기업인 어느 전자회사에서 경쟁업체로 이직한 연구원들에 대한 전직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법원은 연구원들에게 1년간 전직을 금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위반할 경우 1인당 하루 3백만원씩을 전 소속 업체에 손해배상하라는 가공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고 거액의 가치를 지닌 연구원들에게 기업들은 재직시에 걸맞은 처우를 해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상시적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요즈음 안정적인 고용도 전혀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처럼 헌법에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침해당할 정도로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우리나라 연구원들이 기업의 노예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 보상은 커녕 희생만 강요 -

오늘날 온 나라가 걱정할 정도로 심각해진 이공계 기피현상은 바로 항상 열악한 처우와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다. 현 참여정부는 그동안 여러 이공계 관련 대책들을 내놓느라 고심했고 또한 몇가지 성과를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법안과 조치들이 강행된다면 현장 과학기술인들의 사기와 의욕은 더 이상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추락할 뿐 아니라, 이공계 진흥을 위한 그간의 대책과 노력들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가 아무쪼록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출처 : http://www.khan.co.kr/kh_news/art_view.html?artid=200410241750251&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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