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

글쓴이
Simon
등록일
2004-11-01 10:23
조회
3,257회
추천
0건
댓글
3건
판사님, 판사님, 우리들의 판사님 2004/10/26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직업 중 하나가 판사입니다.
특히 연방대법원 판사들은 미국사회에서 엄청난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예전에 어느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판사 외에도 교사, 군인 등이 미국인들의 강한 신뢰를 받는 선두그룹이고,
제일 불신당하는 직업은 중고자동차 거래상이었고,
꼴찌그룹에서 변호사와 기자가 같이 바닥을 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에서 제일 팔자 좋은(?) 직업이 바로 판사라고도 하지요.
변호사의 길을 걸었을 경우와 비교할 때 수입이야 말할 수 없이 적겠지요.
하지만 헌법해석 권한을 가진 연방대법원 판사들의 판결은 그 하나 하나가 역사이자 곧 법입니다.

연방대법원 판사들은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는 ‘종신직’입니다.
미국사회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종신직은
테뉴어 받은 교수와 판사 빼고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판사들은 대통령이나 의원들처럼 다음 선거 때문에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고
행정부 관리들처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의회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에게 시달리지도 않습니다.
사법부는 보호받고 존경받지요.
미국사회에는 “재판권이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면 자유란 있을 수 없다”고 했던
몽테스키외의 말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면서 사법부의 독립을 어떻게든 지켜주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비서가 “판사는 판결로 말할 뿐”이라며 거절하더군요.
판결문이 좀 길고 복잡합니까.
읽어봐도 뭐 하자는 소리인지 모를 때가 많지요.



지난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주 재개표 소동은 결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이 마무리지어
부시를 당선시켜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때도 방송·신문사들은 변호사와 법학자 등을 동원해서 팀을 만들어 판결을 기다리더라구요.

법을 잘 모르는 기자들이 판결문을 즉시 이해하지 못해
오보하거나 보도가 늦어질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지요.









소위 입법-사법-행정부의 3권 분립으로 세 기관이 서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미국사회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법부의 권위가 제일 높고, 그 다음이 의회,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이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니까 대통령이 뭐든 다 하는 것 같아도,
대통령은 “의회여, 맨날 서로 싸우지만 말고 제발 000법안을 통과시켜 다오”라고 호소하기 바쁩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더 절절하구요.
그래서 미국이 어디로 가는가를 알려면 대통령을 보지 말고 의회를 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종교, 낙태 등 정말 사람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의 큰 방향을 정하는 것은 연방대법원입니다.
최근에도 그랬지만, 십계명을 주 의사당 앞에 두는 게 정당하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하급법원에서 판결이 제각각 다르게 나오자,
연방대법원에서 “이제부터 그 문제를 생각해보겠노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럼 다들 조용해지고 판결이 나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어떤 분쟁에 연방대법원이 뛰어들면,
바로 그 시점이 정치적 상상력이 끝나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주 재검표 위헌판결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인데,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은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표를 다시 세자는 식으로 연일 싸우고 있었습니다.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민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수작업 재검표를 지시했고,
연방대법원은 다시 공화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수작업 재검표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당시 판결의 주요 내용은
수작업 재검표를 할 경우 유효표의 판단기준이 달라져서 유권자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수 없고,
추가작업 없이 정당한 과정을 거쳐 재검표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위헌판결은

연방대법원 판사들 9명이 투표해서 5 대 4로 부시를 선출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부시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임명한 판사들이 아들 부시를 당선시켜주었다고 해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요.
그러나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이 판결을 받아들임으로써 혼란은 막을 내립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비정치적인 것처럼 보이는 판결행위를 통해,
사실은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클레어런스 토머스 판사는 기자들에게
“정치의 법을 연방대법원에게 적용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사법부는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고 판결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 특수한 권력이지요.
2000년 미국대선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가 아니라,
“양당 대선후보를 위한, 변호사에 의한, 판사들의 정치”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미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법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신뢰를 보이면서 이 판결을 수용합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미국 여론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는
미국 민주주의 방식에 뭔가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연방대법원 판사들이 개입해 결정한 대선은
미국 민주주의 제도에 내재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한 것이냐,
아니면 제도의 치명적인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긴급처방을 했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그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한두달 후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 정부가 취임하고 사회는 그럭저럭 굴러갔지요.



당시 미국언론들은 좀 찜찜해 하면서도
‘상처는 남았지만 앞으로 잘하면 된다. 다 선거개표 기술이 낙후돼 일어난 일 아니냐.
혼란스러웠지만 다들 맡은 역할을 잘 해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도 잘 풀어나갈 수 있으니
역시 미국 시스템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 아닌가. 미국역사에 역경이 한두번이더냐.
이번에도 잘 극복해나가자’ 이런 식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셀 때마다 다른 숫자가 나오는 투표함에 확 불을 질러버리고
거리로 뛰어나가 “이번 선거는 무효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무언가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 하는 기대로
다들 참고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사회의 지도층이나 여론 주도층들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큰 문제가 생기면 “어, 이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군.
다들 조심하자. 지도가 없는 땅에 들어섰다” 이런 식으로 경계경보를 울립니다.
그리고 나서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하는
온갖 주장과 의견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렇게 한바탕 끓고 나서 가닥을 잡아나가지요.



그 엉망진창이었던 플로리다주 재개표 소동이 36일간 계속되는 동안,
미국사회가 서로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여 듣고 조정하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주 들었던 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찾아온다면 뭐라고 할까?”


제가 만나본 미국정치학자들 대부분의 대답은
“이렇게 잘 돌아갈 줄은 정말 몰랐다고 감탄할 것”이라는 겁니다.



최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
우리 사회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이것 저것 자료를 뒤지다가 예전 생각이 나서 한번 써봤습니다.
더 붙들고 있으면 정교해지기는 하겠으나
너무 복잡해질까봐 여기서 줄입니다.



아래 덧붙이는 내용은
미국정부가 최초에 어떤 아이디어로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제일 잘 알 수 있는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즈(Federalist Papers)’ 중 사법부에 관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한국에서는 '연방백서'라고 부른다고 어느 독자분이 알려주셔서 추가합니다.)


미국은 우리와는 권력구조에 차이가 있지만,

미국사회에서 왜 사법부를 그토록 중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고,
또 요즘 같은 때 우리도 한번 생각해볼만한 내용인 것 같아서 몇줄 골랐습니다.
(페더럴리스트의 저자는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입니다.)




“사법부는 헌법의 정치적 권리를 손상시킬 능력이 가장 적다.
행정부는 명예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사회라는 칼, 즉 수단을 갖고 있다.
입법부는 예산을 주관할 뿐 아니라 시민을 규제하는 의무의 책임을 규정하는 법을 만든다.
반면 사법부는 칼도 돈도 갖고 있지 않으며,
사회의 힘이나 부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사법부는 힘도 의지도 없으며, 단지 판단만을 내린다.
심지어 판단의 효력을 위해서도 행정부의 도움에 의존해야 한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연합효과는
-비록 명목상으로는 명백하게 분리돼 있을지라도-
전자의 후자에 대한 의존의 결과로 인해 발생하며,
사법부가 지닌 본래의 허약함 때문에
사법부는 두 부서의 연합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하고 위압당할 수 있는 위험에 계속 노출돼 있다.
관직의 종신직만큼 사법부의 확고부동함과 독립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종신제도는 사법부를 설립할 때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어야 하며
대중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피난처로 간주돼야 한다.”



“법정은 시민과 입법부 사이에 중재역할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법부가 입법부의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시민의 권한이 사법부나 입법부의 권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과
법령을 통한 입법부의 의지가 시민의 의지에 반하는 경우,
헌법에 명시된 대로 법관은 입법부보다 시민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가정
한다.”

  • Simon ()

      강인선 기자, 미웠는데 저 글 때문에 좋아지기 시작. 역시 전 냄비 !

  • 배성원 ()

      저는 좀 다른 시각이 있습니다. 어쩌면 미국인의 저런 시각은 그네들의 사회체제를 좋은 것으로 보이도록 하기위한 일종의 자화자찬일수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미국의 일반 시민에게는 다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우리도 얼추 비슷하지 않습니까? ^^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좋은 국민이 있다는 점과, 선거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그에 승복하는 '정치인'이 있는 사회라는 면을 부각시켜 주는 글이지요.
    그런데 그 아무나 대통령이 타국에 대해 거짓과 위선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불량국가 운운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이나 해 보고 그렇게 자화자찬을 할 수 있는지.... 저는 좀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좀 다른 시각이 별무소용이라는거 알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요즘 미국 대통령이 어디 미국 대통령 입니까? 거의 80%가 넘는 세계를 떡주무르듯 하는 대통령인데요..... 그네들이 이런 책임의식이 있다면 그네들의 의사를 투명하고 명백히 반영해줄 선거제도를 갖춰야 할 당위가 성립이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건 저로서는 뭐랄까..... 의무는 하지않고 권리만 누리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 준형 ()

      다른것 보다 결과에 승복할수 있다는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지난 선거와 이번 선거를 토대로 조금 더 개선된 선거 과정이 나올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서 메인에서는 승자 독식 제도가 아니라, 3개의 표를 나누어 가집니다, 표를 얼마나 얻었으냐에 따라서, 마침 콜로라도도 이번에 주법을 그렇게 바꾸는 선거를 11월 2일에 동시에 진행 하고 있죠.

    선거 제도를 바꾸기가 어려운 이유는 미국 헌법에 따라서 선거는 각 주의 재량 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한국 처럼 선관위의 막강한 힘을 미국에서는 거의 느낄수가 없죠. 오하이오주인가요? 주 정부의 선관위장이 공화당 선거위원장을 겸하기도 합니다. 저로써는 옆에서 보기엔 엄청난 부정 선거 다움이 느껴 지기도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결국엔 이기는 선거이기도 하구요.

    어찌되었던 누가 대통령이 되던 일반 시민 에게 더 중요한 결과는 주지사와 연방 상, 하원 의원, 동네 의원들 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도 막상 대통령은 부시를 지지 하면서 주지사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슷하게 많은 민주당원들이 현 공화당 연방 상원 의원을 전폭 지지 하고 있기도 합니다. 막상 학교 노조도 케리와 민주당을 지지 하고 있지만, 상원의원은 현 공화당 상원 의원을 지지 합니다. 지난 몇년 동안 학교에 가져온 돈이 $500 Million 이 넘어가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 한거겠죠.



펀글토론방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추천
7639 민태기박사 글, 태극기 휘날리며 묵공 12-30 885 0
7638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미국의 어른들 (경찰 포함) 시간 05-10 1249 0
7637 이영훈의 왜곡을 영어책 한방으로 보낸 이민진 댓글 1 시간 04-26 1266 0
7636 방역을 못했다고 왜곡하는 ... 댓글 1 리영희 02-22 1274 0
7635 피를 토한다는 류근일 글을 보고 시간 01-31 1262 0
7634 찰지고 통쾌한 욕설 - 줄리아 가너 (배우) 시간 01-26 1454 0
7633 내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시간 01-24 1160 0
7632 삼프로 티비 - 안철수 편 (이공계 출신) 리영희 01-05 1374 0
7631 부동산 허영심만 부추기는 말도 안되는 기사 리영희 12-03 1314 0
7630 Olympic 메달의 의미 - 하형주 리영희 11-23 1301 0
7629 donga- 패배자 입장에 있는 시각의 기사 시간 11-11 1340 0
7628 쭝앙- 왜곡된 오이시디 2000-2060 경제 보고서 댓글 1 시간 11-09 1450 0
7627 남의 딸 성적표 리영희 09-01 1670 0
7626 Atlanta spa 총기 사건: 명복 빕니다 리영희 03-21 1768 0
7625 가디언십 익스플로이테이션 리영희 06-26 2544 0
7624 2015년에 본 2020 년? 리영희 06-11 2091 0
7623 수 초내 코로나 바이러스 검출하면 좋겠으나 묵공 05-20 2137 0
7622 n번방 방지법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루토 05-12 2155 0
7621 삼성바이오 관련 보스톤 "바이오젠", 슈퍼전파자로 시간 04-14 2141 0
7620 코로나 검체 취합 검사법이 널리 쓰이게 될까? 댓글 2 묵공 04-10 2553 0


랜덤글로 점프
과학기술인이 한국의 미래를 만듭니다.
© 2002 - 2015 scieng.net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