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마클럽]대덕 연구단지 아빠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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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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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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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마클럽]대덕 연구단지 아빠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

이주혜

입력 : 2004.11.01 09:31 31'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소위 ‘대덕 연구단지’다. 대덕 연구단지가 조성된지 얼마전 30년이 되었다. 여고시절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는 볼펜 껍질은 만들어도 볼펜심은 못 만드는 나라라고. 선진국의 부품을 가져다가 조립만 하지 말고 우리 기술로 뭐든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 충청도의 대덕이라는 시골에 과학기술자들이 모여있는 연구단지가 있는데 여러분도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를 짊어질 연구원이 되어 그곳에 가보라고.
과학기술 쪽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어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멍하니 창 밖의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던 여학생이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우연히 이곳 대덕연구단지에 살게 되었다. 여전히 과학기술의 미래보다는 오늘 저녁거리 걱정이 우선이지만, 지구는 독수리 오형제가 지키듯 대덕연구단지는 내가 신경 안 써도 꼬박꼬박 나가 지켜주는 이가 있다. 바로 남편이다.

누가 남편의 직업을 물으면 나는 보통 ‘회사원’이라고 한다. 부모님들은 남편의 직업을 ‘연구원’이라고 부른다. 남편은 소위 재벌기업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이다. 그러니 회사원인 동시에 연구원이다. 어린 시절 ‘연구원’ 하면 흔히 상상했던 모습이 흰 가운을 입고 은테안경을 쓰고 플라스크나 비이커 같은 걸 들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날렵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흰 가운은 커녕 흰 옷도 입지 않는다. 매일 실험장비를 만지고 가끔 납땜도 하다보면 두꺼운 청바지도 뽕뽕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공대 출신이기 때문에 플라스크나 비이커와도 거리가 멀고 다행히 눈이 좋아 안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편안한 복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쇳덩이나 화학약품 연기가 폴폴 날리는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연구단지에 살다보니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농담이 있다. 이곳에서야 길에 치이는 게 석·박사요 명문대 출신이니 어렸을 때 공부 잘했다는 말, 좋은 학교 나왔다는 말, 학위가 있다는 말 정도는 자랑거리 축에도 못 낀다. 오죽하면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못 사는’ 집이 연구원일까. 아이 유치원 친구 중에 아빠가 서울대 박사인 아이가 있는데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묻더란다. 왜 아빠는 누구 아빠처럼 의사가 되지 못하고 겨우 연구원 밖에 못되었느냐고.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사실은 그냥 샐러리맨과 똑같거나 혹은 더 혹독하고 (밤늦도록 일해도 야근수당 따위도 못 받는다) 10년 넘게 청춘을 바쳐 공부해 학위받고 해도 대우가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고(박사수당이라는 게 몇만 원 있거나 혹은 그나마도 없는 회사도 많다) 그러다 40대가 되면 직장에서 밀려날까 전전긍긍해야 하니 연구원이라는 명함만큼 빛 좋은 개살구도 없다.

실제로 남편 주변 인물들 중에서 일찌감치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의대에 진학한 사람도 몇 되고 다단계 판매에 뛰어들거나 아예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경우도 많다. 자기 인생을 건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빚어낸 결과다. 노력한 만큼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다는 점,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연구환경이 조성되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정책이 흔들린다는 점, 본업인 연구보다 연구 외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한국적 특성들이 바로 오늘날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낳았다고 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구는 연구원들이 하지만 그 연구원들을 움직이는 정책입안자들, 혹은 경영자들이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 아니니, 옛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 운운했던 한국적 전통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묻고 싶다. 이공계 출신이 그저 한낱 기능인 정도로 전락해버린다면 이건 연구원들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미래가 걸린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요즘 대덕 연구단지의 박사 아빠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있단다. 자식이 “아빠 자꾸 그러면 나 이과 갈 거야”라고 말할 때란다. 과장된 농담에 불과한 걸까? 이 농담을 듣고 깔깔 웃는데 웃음 끝이 영 개운치가 않다. 실제로 남편도 아이가 공대를 가겠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겠다고 한다. 남편뿐 아니라 주변의 연구원 아빠들이 다 그렇게 얘기한다.

“내가 미쳤지. 의대나 치대, 한의대를 갈걸. 괜히 서울대 공대를 갔다”며 후회하는 주변 ‘박사아빠’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과학고 출신들도 대부분 의대를 지원하는 현실, 갈수록 우수인력들이 이공계 지원을 꺼리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

일개 기업의 연구원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경우를 보고 참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중국은 관료의 70%이상이 엔지니어출신이라고 한다. 인문계열 출신과 이공계 출신을 비교해서 누가 더 대우가 낫네, 누가 더 손해네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자원 적고 땅덩이 좁고 해서 사람 말고는 믿을 게 없는 나라에서 사람을 키우는 일에 치우침이 있고 소홀함이 있는 부분에 대해 지적을 하자는 것이다. 인재양성 말고는 경쟁력이 없다는 말을 수십 년 전부터 반복해왔으면서 소위 인재라는 사람들이 다들 편안히 돈만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나라라면 그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아직도 아인슈타인이나 퀴리부인이 되겠다고 실험실의 불을 밝히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 젊은이가 바보 취급당하는 일만은 없어야 될 것 아닌가?

“아들아, 너는 절대 공대가지 말고 차라리 의대나 한의대나 치대를 가거라. 아니면 법대는 어떻겠니?”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말을 내 자식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4년 대덕 연구단지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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