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계절에 따른 밤샘 동지들의 변천사

글쓴이
천칠이
등록일
2002-09-04 03:29
조회
6,4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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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건
토론에 관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그나마라도 대학원생의 일상 중 하나인 '밤샘'과 관련해서 짧은 잡담이나 하나 할까 합니다.

 지금도 날밤을 까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날을 새며 서류를 쓰거나 실험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밤샘 동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중엔 실제로 사람인 '동지'들도 있지만 사람이 저 하나뿐일 때에도 같이 날을 새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벌레들입니다.

 일하는 곳 근처가 풀밭이라서 참 갖가지 벌레들이 많이 방문합니다. 간혹 우리 연구실은 곤충이나 박물학 같은 걸 하면 더 잘 하지 않을까 농담도 합니다. 그쪽을 잘 모르다 보니 비스무리한 것들은 그냥 다 하나의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못생긴 나비처럼 생겼으면 그냥 나방, 머리에 뿔달린 벌레는 무조건 사슴벌레, 똥똥한 껍질을 엎고 있으면 풍뎅이, 물론 파리, 모기, 정도는 구분합니다만.

 올 여름엔 유난히 '나방'의 공격이 극심했습니다. 예전과 종류가 좀 바뀌어서 노랗고 검은 알록달록한 점무늬가 찍힌 것들인데 밤에 켜져 있는 형광들을 보고 달려드는 습성은 같아서 꼭 불 밑에는 그 놈들 시체가 널부러져 있습니다. 한 7월 경에는 모기잡겠다고 사놓은 전자식 모기향에 요놈들이 대량학살 당하더군요. 한 새벽 세시 경 멋모르고 엎드려 자다가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자다 깨 보면 수많은 알록이 나방들이 약에 취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두평 남짓한 공간에 한 두놈 죽어서 뻗어 있거나 한 세 놈은 힘없이 퍼득거리거나 한 두놈은 그나마 쌩쌩해서 저공비행을 해댑니다. 그러고 나서 아침이 되면 가관이죠. 킬링필드의 시체를 연상시킬 만큼 많은 나방들이 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걷다가 무심코 발로 밟으면 "쩍" 하는 제법 큰 소리를 내고 몸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바닥에 짓이겨져서 떡처럼 붙어 버리죠.

 여름이 다 되어 가는 무렵에는 매미가 난리를 칩니다. 우는 소리도 참 가지각색이라 어떤 놈은 그냥 단순하게 "미암, 미암, 미암, 미아아아아암~" 이렇게 울고 어떤 놈은 싸이렌처럼 시작해서 "이이이이잉~ 이이요이, 이이요이, 이이요이이이이잉~" 이렇게 웁니다. 어느 해 여름인가는 빈 책상 언저리에 두 구(?)의 매미 허물을 발견했었더랍니다. 가까이서 보니 에일리언이 허물 벗은 것처럼 정말 징그럽더군요. 황급히 누군가 떠나 버린 책상에 아무도 모르게 붙어 있던 매미의 허물은 참 묘한 아이러니였습니다.

 가을이 되어가면 이제 귀뚜라미 차례군요. 그래도 얘들 소리는 참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살찐 귀뚜라미는 바퀴벌레처럼 좀 징그럽지만 (귀뚜라미가 바퀴벌레 "목"이라면서요? 고등학교 때 종속과목 하면서 외우던 기억이...) 나름대로 오동통한 것이 귀여울 때도 있죠. 한밤 중에 오줌누러 갔다오면 달도 보고 귀뚜라미 소리도 듣고 절로 시조라도 한 가락 뽑아야 할 것 같았더랍니다. 그래봐야 "한 손에 메뉴얼 들고 깊은 한숨 쉬는 차에 어디선가 선배 목소리 나의 애를 끊나니..."수준이지만.

 이외에도 깜짝 게스트들이 참 많습니다. 사슴벌레라고만 부르는 뿔 달린 족속들, 장수하늘소라고만 부르는 긴 수염 달린 무리들, 청록빛 껍질의 풍뎅이 무리들, 어쩌다가 X-file에나 나옴직한 요상하게 생겨먹은 외계 생물 같은 벌레들. 안타깝게도 오늘 밤샘 동지는 짜증나게 빠른 모기 한 마리뿐이군요.

 이제 좀 자야겠는데 나중에 잘 때 콧속에나 안 들어왔으면 합니다.

 

  • 안일운 ()

      하하하... 재미있는 글입니다. ^^

  • 박상욱 ()

      한편의 수필이군요..방충망 하고 요새 유행하는 '전기충격 살충등' 하나 사시죠.. 전 벌레라면 아주 싫어해서 그 연구실에선 일 못하겠네요 ^^

  • 준형 ()

      전 낮에 벌떼들 하고 놀곤 하죠, 오늘밤엔 scieng 밖에 없겠네요. 언제나 이 lab write-up 을 다 하고 잘런지, ㅠ.ㅠ

  • 임호랑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허윤 ()

      재밌습니다... 근데 왠지 공돌이의 짙은 페이소스가 맘속 한구석에서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홀홀....

  • 소요유 ()

      ㅎ,ㅎ,ㅎ,

  • 보통상식 ()

      몇번 읽다보니 저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의 캠퍼스 편이군요. ^^

  • Les Miserables ()

      아...밤샘의 고통을 이렇게 흥미롭게 표현하시다니.. 전 밤샘하면 몸 생각한다고 컵라면대신 생생면에 참치캔 하고 같이 먹던일,창고에 처박힌 교수님 안락의자 끌어다가 잔거, 겨울에 잘 땐 추웠던게 생각나네요. 가끔 kids도 하고 ㅎㅎ

  • 반치범 ()

      이야, 어떻게 이렇게 제가 다니는 실험실이랑 비슷하죠? 혹시 제가 아는 분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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