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9월 18일...

글쓴이
천칠이
등록일
2002-09-18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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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도서관을 향해 북쪽으로 뻗은 평평한 길은 자연대와 공대를 구분짓는 길과 만나면서 조그만 삼거리를 만든다. 그곳에서는 예전에 의예과 학생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화학실험을 하던 대학원생들이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던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겨울이 다가올 때면 매서운 바람을 참으며 담요을 두르고 책상에 앉아 투표를 독려하는 선거관리 학생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이 삼거리 남쪽에는 계단과 함께 잔디 비탈이 나있고 그 위로 커다란 철제 가건물을 볼 수가 있다. 기존에 있던 학교 건물과 같은 높이로 지어졌지만, 그냥 하나의 커다란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를 연상시키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앞으로 이런 공대 건물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개의 추모비가 서 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앞을 웃고 떠들며 지나다니고, 간혹 흘끔 그곳을 쳐다보고 가기도 한다. 건물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양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3년 전 이맘때 있었던 이곳의 광경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들>

    정확히 3년 전, 1999년 9월 18일의 새벽이 기억난다. 금요일 밤이었지만 다음 날 있을 무슨 회의를 위해 선배 두 명과 날을 새며 자료를 출력 중이었다. 마침 예상치 못한 가을비가 내린 탓에 돌아가는 길은 평탄치가 못했다.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세 명이 겨우겨우 정문까지 걸어내려갔고 어째어째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나는 비와 땀으로 온몸이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었다.

    그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지나왔던 그곳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철제 가건물의 반 이상이 종이를 구겨놓은 것처럼 찌그러져 있었고 곳곳에는 유리 파편이 튀어 있었다. 면접을 보러온 듯한 한 고등학생과 학부형이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고, 소방관, 경찰관, 기자, 응급의료진 등 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잠시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새벽, 빗속을 걸어내려 오면서 평소처럼 건물 안이 환하게 불을 밝힌 것을 보았고 사고 연구실 사람들도 우리처럼 또 날을 새며 일을 하는가보다 하고 덤덤이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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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명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생명에 지장을 줄 만큼 심한 3도 화상이었으며 세 명은 모두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폭발사고였다. 사람들이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리고 그 세 명은 아마도 그 중심부에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사고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암반 발파용 알루미나 분말이 폭발했다는 말이 들렸다. TV에서도 종일 그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고, 평소 연락이 없었던 사람들의 걱정에 답하느라 전화 통화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했다.
    한 친구가 Y 형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구급차에 실려갈 때까지만 해도 형은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발에 눌러붙을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Y 선배는 동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어 올리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신발이 눌러붙는 화상이라...

    시간이 흘렀다. 힘겹게 숨을 이어오던 T 형이 제일 먼저 끈을 놓았다. 곧이어  Y 형, 그리고 후배 H. 차례로 목숨을 잃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고 발생 사흘 째였던가,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부의금을 모아 병원으로 향했다. 선후배들, 교수님들, 유족들. 나란히 마련된 분향소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차례차례 세 사람의 유족들을 조문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오열했다. 친구와 함께 Y 형의 영정에 국화를 놓고 나올 때는 형의 어머님께서 형의 이름을 부르며 옆에 있던 친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소동이 있었다. 사람들이 겨우겨우 말려서 어머님을 떼어 놓았고 친구는 "내가 죽으면 우리 어머니도..."라면서 슬쩍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대학원생들은 모두 영안실을 떠나지 않고 이런 저런 일을 유족들과 함께 도왔다. 다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 쯤인가 유족들과 교수님들의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로 사고 관련 경위에 대한 경찰 측의 조서가 문제가 된 모양이다. 작은 규모의 의견 충돌은 여기 저기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듯했다.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말리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구석 어딘가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세 사람의 영구는 이미 차에 오른 뒤였다. 잠시 병원에 마련된 곳에서 교수님들과 학생대표 등이 송별사를 하고 차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사고가 난 건물 앞에서 다시 한번 제를 올리고 영구차는 세 사람이 영원히 몸을 누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자리에는 세 개의 추모비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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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추석이었다. 이래저래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고 집에서도 즐거운 소식은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짐짓 걱정스레 사고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으례 그러했듯이 대학원 생활이 어쩌고 그쪽 연구실이 어떻고 우리 연구실은 어떻고 틀에 박힌 설명을 해줬다. 어머니께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설마하니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일까지 하는 줄은 생각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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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대책이 마련되었고 삼풍이니, 성수대교니 하는 사건들 뒤로 오랜만에 "안전결핍증" 어쩌고 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원생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들이 하나 둘씩 취해졌다. 여기 저기에 소화전이 좀더 생기고, 무슨 샤워기 같은 것들이 붙고, 원생들 불러다가 창고 정리하고, 안전교육 강화하고 그런 일들이었다. 학부생들 중 몇몇이 실태조사를 한다고 설문지를 돌렸다. 후배들과 사고 및 대학원 문제에 대한 의견들을 나눴고 YBM에서 나온 기자한테 우연히 걸려서 친구와 함께 인터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변화의 전부였던 것 같다.
    겨울이 왔다. 박사 시험을 준비했고, 석사 논문을 위한 코드 계산, 그리고 논문작업, 병역특례 시험, 바쁘게 몇 개월이 흘렀고, 정신을 좀 차릴 때쯤에 난 박사과정 1년차가 되어 있었다.

<며칠 전>

    사고 건물과 함께 추모비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겉은 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그 무렵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실험이 많았고 언제나 교수님과 학생들이 분주히 그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연구실로 옮겼고 남은 선배 한 명이 강원도 철원의 어느 폐교를 개조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사고 건물도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창고처럼 물건이나 장비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연구실 좁은 공간에서 교수님과 함께 밥을 해먹던 모습이나 늦도록 일을 끝내지 못하고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T 선배가 친절히 "space charge effect"로 전자빔을 만드는 어려움을 설명해줬던 것이나, Y 선배가 골 밑에서 내 훅슛을 블락했던 것, 그리고 과방에서 똘똘한 표정으로 리포트의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던 후배 H의 얼굴, 나는 그런 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추모비에는 동판으로 만든 고인들의 얼굴 아래로 "이러저러한 연구에 종사하고..."하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같은 과였던 나에게도 그런 글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 빗물을 맞으며 그들이 무슨 연구를 했던가 하는 하얀 글씨들이 씻기듯이, 세상에서 그들은 잠깐 세인의 주목을 받곤 하는 의인들처럼 잊혀져 갈 것이다.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계절이 가고 다시 계절이 오고, 그런 속에도 미싱은 잘도 돌아가고 있다. 삼거리 비탈진 잔디도 계절에 따라 파랗게 노랗게 변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의 바퀴에 맞춰 길을 가고 있다. 새벽의 찬바람이 졸음을 깨우고, 밤을 지새고 졸음을 견디며 깨어있는 자들이 동터오는 새벽을 맞이하듯이, 한 다발 초라하게 비석 아래 놓여 있는 꽃다발이 길들어 가는 우리들의 기억을 깨우고, 깨어있는 우리들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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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그날처럼 오늘도 밤을 지새며.

  • 임호랑 ()

      첨단과학기술전쟁에서 싸우다 스러진 이들이 왜 전사가 아니고, 왜 호국영령이 아니란 말인가?

  • 김상현 ()

      씁쓸해지네요 글을 읽으니..

  • 소요유 ()

      울적합니다. 한편으로 애처롭고, 한편으로 허무해지기도하고..... 뭐 그렇습니다.

  • 배성원 ()

      당시 많은 대학원생들이 개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생들, 학교는 다르지만 나중에 같이 일할 동료였는데...죽고나서 뭐가 있었나요? 저도 출장가면 그 건물 그 개조한 앞쪽으로 난 길로 항상 다니곤 했습니다. 왜 보통 공대식당 앞에서 택시 내리잖습니까? 거기서 원자핵공학과 모 교수님 실험실 가려면 그 길이 젤 빠르거든요. 지나가면서 얼굴도 마주친 적이 있고요..........

  • 정문식 ()

      임호랑님께 한표.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유가족들을 예우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성백경 ()

      그날 토요일이었던 거 기억납니다. 그때 전 학부 2학년이었고 길 건너 맞은편 자연대 건물에서 땜질을 하고 있었죠.

  • 성백경 ()

      정신이 없었는지 옆건물이 폭발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녁때 버스타고 나가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길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집에 가서 뉴스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이 놀랐었죠.

  • 성백경 ()

      대학원생이 된 지금 그때 일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먼저 가신 분들께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 트리비어드 ()

      그 날 일시적으로 충격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웹 서핑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놀랐죠. 하지만 단순히 전력 공급 문제인 줄 알았고 학교내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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