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광풍' 심각하다 [한겨레 기사]

글쓴이
배일주
등록일
2002-05-21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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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광풍' 심각하다 >

 
이 나라 수재 수만명이 뛰어들어 해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사법시험은 기회균등의 상징인가 나라 망치는 재앙인가? 합격자 수가 대폭 늘긴 했지만, 현행 사법시험은 여전히 일단 합격만 하면 일거에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신분상승의 기제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비슷하다. 이로써 좁은 문을 향한 고급 인재들의 쏠림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대학의 기초학문 황폐화에 고시열풍이 한몫하고 있다. 반면, 우리와 비슷했던 일본의 사법제도는 크게 바뀐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 두 번의 사법개혁 기회를 모두 놓친 우리와 대조적이다. 고시광풍의 실태와 사법개혁 등을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 3만명 돌파…인문·이공계생도 준비
30대 수험생 늘어…˝응시제한 검토할 때˝ >

“사랑하는 내 아내 그리고 이제 두 살 된 귀여운 우리딸 …. 정말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3년만 참아주렴. 내 비록 지금은 피눈물 뿌리며 아는 사람도 가본 적도 없는 고시원으로 들어가지만 다시 돌아올 땐 지금의 아픔, 지금의 슬픔 다 보상해주마.”

최근 사법시험 관련 전문사이트인 사시로(sasi-law.co.kr) 게시판에서 찬반 논란으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글의 일부다. 이 글을 쓴 주인공은 아내와 어린 딸을 부양하는 올해 나이 34살의 가장이다. 그는 지난해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 10여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그만둔 뒤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16평 아파트와 자동차를 팔아 사법시험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남편은 기약 없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원으로, 아내는 어린 딸을 안고 친정집으로 향하는 이 가족의 생이별에서 우리 사회의 고시광풍 현상이 잘 드러난다. 올해 제44회 사법시험 및 군법무관 임용시험 응시자는 3만23명(1차시험 면제자 2368명 포함)으로, 사상 처음 3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무려 2356명이 늘어난 수치다. 사법시험 응시자는 1991년 1만2925명을 비롯해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1만명 안팎이었나, 96년 합격자 수 확대와 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국면을 거치면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학 1, 2년 등 저학년까지도 대학의 낭만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대거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서울 신림동에 있는 고시학원인 한림법학원의 조대일 실장은 “법대생의 경우 요즘은 늦어도 1학년 말에 본격적인 시험 공부를 시작한다”며 “3, 4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던 과거에 비해 고시 준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이런 고시광풍으로 기초학문 분야인 인문·사회대 쪽이나 이공계 쪽 학생까지도 사법시험에 대거 매달리면서 대학의 학문연구 토양이 황폐해지고 있다. 기초학문 분야의 대학원 진학자가 몇 해 째 미달사태를 보이고 있는 반면, 비법대 출신의 사법시험 응시자나 합격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대학의 `고시 블랙홀'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서울대의 경우 2차 사시 합격자 387명 가운데 비법대생은 173명(44.8%)으로 절반에 육박한다. 이 중 기초학문의 요람인 인문대는 철학과 5명을 비롯해 국문, 국사, 영문학과가 각각 4명 등 거의 모든 학과에서 1~3명씩의 합격자가 나왔다. 인문대 4학년 김아무개씨는 “예전에는 몰래 시험 공부를 했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10여명씩이나 돼 더는 숨기려들지 않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이공계 쪽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대 물리학과와 공대 금속공학과가 각 3명씩을 비롯해 서울대 이공계생의 지난해 2차 합격자 수는 모두 31명에 이른다.

더구나 대부분의 4년제 대학이 고시반을 학교 공식기구로 운영하면서 고시광풍을 부추기는 등 대학의 고시 학원화를 재촉하고 있다. 대학 당국은 전공에 관계없이 고시 준비생을 선발해 공부 장소 제공과 장학금 지원 등 온갖 특혜를 주어가면서 시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고시반 운영의 원조격인 ㅎ대는 500여명에게 무료특강과 기숙사 무료입사의 혜택을 주고 있으며, 1차시험 합격자는 식사도 공짜다. 대부분의 대학이 실태가 비슷하며, 대학 예산의 절반 이상을 고시반 지원에 사용하는 일부 사립대학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ㅎ대 법대의 한 교수는 “시험보는 기술을 가르치는 고시반을 대학이 운영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그러나 고시 합격자 수가 대학의 서열로 여겨지는 풍토와 `학교수업 따로 시험 따로' 식의 현 사법시험 제도 아래서는 고시반 운영을 포기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최종 합격자가 전체 응시자의 0.03%밖에 되지 않는데다 퇴출제도가 없는 지금 제도 아래서는 고시 재수생들이 늘 수밖에 없어 고급인력이 낭비되는 점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연간 최종 선택되는 사람은 1000명에 불과해 사회 각계의 중추를 담당해야 할 엘리트 3만여명이 사회적으로 사장돼 있는 것이다. 실제로 2차 합격자 가운데 31살 이상의 나이층 비율이 갈수록 늘고 있다. 90년 18%에 불과하던 이 비율은 지난해는 43%까지 올라갔으며, 올 44회 1차시험 합격자 가운데 31세 이상은 38%에 이른다.

시험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고시생을 상대로 인터넷쇼핑몰(chepia.co.kr)을 운영하고 있는 이용구(35)씨는 “시험을 포기한 사람들이 1~2년 지나면 대부분 고시촌으로 다시 돌아온다”며 “대안을 찾을 수 있는 나이에 고시를 그만둘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러한 고급인력 낭비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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