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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계절에 따른 밤샘 동지들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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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칠이 작성일2002-09-04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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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 관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그나마라도 대학원생의 일상 중 하나인 '밤샘'과 관련해서 짧은 잡담이나 하나 할까 합니다.

 지금도 날밤을 까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날을 새며 서류를 쓰거나 실험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밤샘 동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중엔 실제로 사람인 '동지'들도 있지만 사람이 저 하나뿐일 때에도 같이 날을 새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벌레들입니다.

 일하는 곳 근처가 풀밭이라서 참 갖가지 벌레들이 많이 방문합니다. 간혹 우리 연구실은 곤충이나 박물학 같은 걸 하면 더 잘 하지 않을까 농담도 합니다. 그쪽을 잘 모르다 보니 비스무리한 것들은 그냥 다 하나의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못생긴 나비처럼 생겼으면 그냥 나방, 머리에 뿔달린 벌레는 무조건 사슴벌레, 똥똥한 껍질을 엎고 있으면 풍뎅이, 물론 파리, 모기, 정도는 구분합니다만.

 올 여름엔 유난히 '나방'의 공격이 극심했습니다. 예전과 종류가 좀 바뀌어서 노랗고 검은 알록달록한 점무늬가 찍힌 것들인데 밤에 켜져 있는 형광들을 보고 달려드는 습성은 같아서 꼭 불 밑에는 그 놈들 시체가 널부러져 있습니다. 한 7월 경에는 모기잡겠다고 사놓은 전자식 모기향에 요놈들이 대량학살 당하더군요. 한 새벽 세시 경 멋모르고 엎드려 자다가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자다 깨 보면 수많은 알록이 나방들이 약에 취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두평 남짓한 공간에 한 두놈 죽어서 뻗어 있거나 한 세 놈은 힘없이 퍼득거리거나 한 두놈은 그나마 쌩쌩해서 저공비행을 해댑니다. 그러고 나서 아침이 되면 가관이죠. 킬링필드의 시체를 연상시킬 만큼 많은 나방들이 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걷다가 무심코 발로 밟으면 "쩍" 하는 제법 큰 소리를 내고 몸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바닥에 짓이겨져서 떡처럼 붙어 버리죠.

 여름이 다 되어 가는 무렵에는 매미가 난리를 칩니다. 우는 소리도 참 가지각색이라 어떤 놈은 그냥 단순하게 "미암, 미암, 미암, 미아아아아암~" 이렇게 울고 어떤 놈은 싸이렌처럼 시작해서 "이이이이잉~ 이이요이, 이이요이, 이이요이이이이잉~" 이렇게 웁니다. 어느 해 여름인가는 빈 책상 언저리에 두 구(?)의 매미 허물을 발견했었더랍니다. 가까이서 보니 에일리언이 허물 벗은 것처럼 정말 징그럽더군요. 황급히 누군가 떠나 버린 책상에 아무도 모르게 붙어 있던 매미의 허물은 참 묘한 아이러니였습니다.

 가을이 되어가면 이제 귀뚜라미 차례군요. 그래도 얘들 소리는 참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살찐 귀뚜라미는 바퀴벌레처럼 좀 징그럽지만 (귀뚜라미가 바퀴벌레 "목"이라면서요? 고등학교 때 종속과목 하면서 외우던 기억이...) 나름대로 오동통한 것이 귀여울 때도 있죠. 한밤 중에 오줌누러 갔다오면 달도 보고 귀뚜라미 소리도 듣고 절로 시조라도 한 가락 뽑아야 할 것 같았더랍니다. 그래봐야 "한 손에 메뉴얼 들고 깊은 한숨 쉬는 차에 어디선가 선배 목소리 나의 애를 끊나니..."수준이지만.

 이외에도 깜짝 게스트들이 참 많습니다. 사슴벌레라고만 부르는 뿔 달린 족속들, 장수하늘소라고만 부르는 긴 수염 달린 무리들, 청록빛 껍질의 풍뎅이 무리들, 어쩌다가 X-file에나 나옴직한 요상하게 생겨먹은 외계 생물 같은 벌레들. 안타깝게도 오늘 밤샘 동지는 짜증나게 빠른 모기 한 마리뿐이군요.

 이제 좀 자야겠는데 나중에 잘 때 콧속에나 안 들어왔으면 합니다.

 

댓글 9

안일운님의 댓글

안일운

  하하하... 재미있는 글입니다. ^^

박상욱님의 댓글

박상욱

  한편의 수필이군요..방충망 하고 요새 유행하는 '전기충격 살충등' 하나 사시죠.. 전 벌레라면 아주 싫어해서 그 연구실에선 일 못하겠네요 ^^

준형님의 댓글

준형

  전 낮에 벌떼들 하고 놀곤 하죠, 오늘밤엔 scieng 밖에 없겠네요. 언제나 이 lab write-up 을 다 하고 잘런지, ㅠ.ㅠ

임호랑님의 댓글

임호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윤님의 댓글

허윤

  재밌습니다... 근데 왠지 공돌이의 짙은 페이소스가 맘속 한구석에서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홀홀....

소요유님의 댓글

소요유

  ㅎ,ㅎ,ㅎ,

보통상식님의 댓글

보통상식

  몇번 읽다보니 저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의 캠퍼스 편이군요. ^^

Les Miserables님의 댓글

Les Miserables

  아...밤샘의 고통을 이렇게 흥미롭게 표현하시다니.. 전 밤샘하면 몸 생각한다고 컵라면대신 생생면에 참치캔 하고 같이 먹던일,창고에 처박힌 교수님 안락의자 끌어다가 잔거, 겨울에 잘 땐 추웠던게 생각나네요. 가끔 kids도 하고 ㅎㅎ

반치범님의 댓글

반치범

  이야, 어떻게 이렇게 제가 다니는 실험실이랑 비슷하죠? 혹시 제가 아는 분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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