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영향평가 (Technology Assessment) - 박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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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2
등록일
2004-06-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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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상욱 (2004/05/10, Hit : 712, Vote : 22) 
 
 
제목    기술영향평가 (Technology Assessment)
 
 

우리나라에서 기술영향평가는 아직 생소한 단어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국내에 개념이 들어온 지 불과 10여년이 지났으며, 우여곡절 끝에 첫 기술영향평가(이하 TA)가 작년(2003년) 이루어졌다.

우리는 수많은 평가의 홍수 속에 지내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대형 토목공사시에 시행하는 환경영향평가가 유명하고, 도심지에 대형 유동인구 유발 시설을 지을 때에 하는 교통영향평가도 있다. 교육영향평가, 남녀고용평등법에 의한 평가 등등 세세한 것까지 하면 한 손으로 세기 어렵다.

이중 TA를 쉽게 이해토록 해주는 예는 환경영향평가라 할 수 있다. '대형 토목공사'를 '신기술'로 치환하여 기술 개발에 따른 긍정적 또는 부정적 효과에 대해 미리 알아보는 것이 바로 TA이다. 유럽쪽에서는 주로 신기술로부터 파생하는 우려점, 사회적 시사점에 대해 무게를 두는데, 좀 두루뭉술하고 철학적인 면이 있어서 '담론형'이라 부른다. 미국쪽에서는 신기술이 혹 우려되는 점이 있으면 기술적으로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정책적으로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는지를 다루기에 종종 '방법론형'으로 불린다.

한마디로, TA는 신기술 개발에 따른 긍정적 효과 -경제적 이익, 기술적 진보, 파급효과, 경쟁력 등-와 부정적 효과-악용, 빈부격차, 소외, 인권-를 종합하여 빠짐없이 예측해보자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사회 전반과 대중의 기술에 대한 이해(지적 이해뿐 아니라 기술 개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이해까지)를 넓히자는 것이다. 물론, 예상치못한 해악이 가져올 혼란에 대해 예방접종 역할을 하고, 심지어 기술 개발을 중단시킬 수도 있다. 이쯤 읽은 독자라면 뭔가 아슬아슬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니, 어떻게 그것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연구개발자를 비롯한 각종 이해관계가 개입하고, 어느 한편의 주장이 부각되면 선명성 경쟁을 통해 지나친 대립각이 세워지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아니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해 무릎을 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우리는 환경영향평가를 둘러싼 각종 불협화음에 이미 익숙하다. 개발자와 기업가, 땅주인과 정부는 토목공사와 그 결과물을 통한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고, 생태론자와 환경단체들은 대안없는 반대에 나서 충돌하고, 영향평가를 수차 다시 시행하고, 법정에 서고 한 일이 대체 몇번인가. 이러니 환경영향평가 위원들은 양측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애매한 평가서를 내는 보신주의에 빠지고, 결국 양측 모두 수긍하지 못하고...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과학기술은 환경 파괴와는 다르지 않나?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반대하는 '과학적 생태론자'들이 존재하는가? 오히려 기술영향평가가 기술만능주의의 독주에 면죄부를 주고 연구비를 따내려는 기업들의 각축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라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다. 한참 순진한 생각이시다.

수년에 걸친 사전 스터디와 관계 법령 정비를 끝내고, 2003년 봄, 국내 최초의 기술영향평가 위원회가 KISTEP 의 운영으로 조직되었다. 첫 주제는 'NBIT 융합기술' 이었다. 속된말로 시범케이스이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NBIT 융합기술이라는 '뜬구름'을 선택함으로써 현장의 첨예한 이해관계에서 한발짝 물러서려는 전술로 보인다. 생명복제니 GMO니 하는 무척이나 예민한 문제를 지금 건드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범위가 크거나 '착하디 착한(='B'와 무관한)' 기술을 다루면 부정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을테니 고심 끝에 선정한 흔적이 보이고도 남는다.

자. 각설하고. 그 경과를 보자. 12월에 평가는 종료되었다. 그런데 최종 보고서와 공청회는 4개월이나 지난 4월에야 열렸다. 언론에는 작게, 그러나 자주, 기술영향평가 위원회에서 새어나오는 기타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랬을까? 그 궁금증은 공청회장에서 자료를 받아 본 순간 풀렸다.

기술영향평가위는 과학기술분과, 산업경제 분과, 그리고 사회문화분과의 세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발표자료는 과기분과와 산업경제분과가 함께 묶여 있고, 사회문화분과가 따로 되어 있었는데... 감상평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앞의 두 분과는 SF 소설을 썼고, 사회문화분과에 의하면 NBIT 융합기술은 인류를 멸망시킬 악마의 기술이다."     

심하지 않느냐고? 근거가 있어야 하니, 발표자료에서 몇가지 문구만 인용해 보겠다.

*과학기술, 산업경제 분과
- 인간의 생활양식과 산업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할 것으로 전망
- 암을 비롯한 난치병의 치료 및 인류의 오랜 염원인 생명연장 실현
- 자연재해 및 재난의 징조를 언제 어디서나 사전에 감지
- 에너지 소비와 오염물질의 감소, 신물질 생산 등 산업발전에 혁명적인 변화
- NBIT 융합기술의 시장규모는 2010년 1,000억 달러로 추정
- 건강한 삶, 안정적 식량 확보, 에너지/환경 여건 개선, 국가안전 확립
- 식량, 자원의 희소성 해결에 기여
- 기존 산업을 고도화시켜 고부가가치를 촉진
- 생산성 향상 및 신산업 창출에 따른 고용 증가

*사회문화분과
- 사회적 불평등 강화(nano divide)
- NBIT에 기반한 감지 및 검출기술은 사회적 차별 강화를 초래할 수 있음.
- 대량실업의 발생 가능성
- 군사기술로 악용될 위험성
- 인식론의 문제(나노 결정론 확산 가능성: 환원주의와 조작주의)
- 환경 위해성(나노물질은 너무 작아서 재래적인 처리과정들을 통과하여 환경과 인간에 축적될 가능성이 높음)
- 인체에 대한 위해성(나노입자들이 세포를 관통하여 기관에 축적될 가능성)
- 자기복제의 위험성
- NBIT 기술이 임상에 사용될 경우 빈부격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
- 연구예산의 일정부분(3~5%)를 사회문화적 영향평가에 배정해야 함.


헉헉. 타이핑이 힘들다. 자.. 같은 기술을 놓고 어떻게 의견이 갈릴 수 있는지 재미있게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 문구들이 필자의 머리 속에서 상상으로 나온 것이라면 재미로 끝나겠지만, 엄연히 국법에 의거 국가 기관에 의해 시행한 영향평가 보고서에 쓰여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재미로 끝날 일이 아니다. 4개월의 보고서 발표 지연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저 내용이 어떻게 같은 보고서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한쪽에서는 고용을 증대시키고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량 실업이 발생하며 새로운 독성물질과 환경 오염이 일어나며 가난한 사람들은 어차피 혜택 못보고 죽을거라고 하는데...?

나중 얘기지만, 관계자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기술영향평가인데, 어떻게 반과학적이거나 과학적으로 틀린 개념에 의한 비판까지 나올 수가 있느냐.. 라고. 그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필자 나름의 진단에 의한 답은 '비~밀' 이다. TA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살포시 털어 놓을지도 모르겠지만.

TA는 기술이 사회를 향해 연 창이다. 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투쟁의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술에 대해 반드시 애정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개념적이거나 기술적인 면은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는 자세는 지양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의 참여는 '선'이지만 몰이해로부터 발생하는 무책임하거나 무조건적인 비판은 '선'이 아니다. '발목잡기'도 안좋지만 그렇다고 'SF fantasy'도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기술영향평가에 양심적이며 객관적고 중립적인 과학기술인이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결정과 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게 옳다면, 마땅히 '과학기술을 아는 시민'부터 모셔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기술과 사회의 완충 역할을 해야 하고, 기술개발의 헤게모니가 국가 권력과 거대 자본에서 일반 국민에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간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 작금의 이공계 위기 속에서, 현장 과학기술인들이 연구실에서 실험과 연구에 매진하는 사이 어느샌가 '쏙 빠진' 왕따가 되어 TA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가만히 앉아서, 통제만 받을텐가? 직장상사와 연구비 전주, 평가기관과 공무원들에게 치이는 것도 모자라 이제 비과학 시민에 의한 통제까지 '네!' 하고 달게 받을텐가. 그것이 팔자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현장 과학기술인의 참여로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과학기술 현장과 1,000 km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과학기술의 위해성과 통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실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현장 과학기술인들은 남의 영역 들여다보고 훈수하기는 커녕, 제 땅에 누가 오줌을 눟는지 관심도 없다니 창피할 노릇이다.

차기 기술영향평가위원회에 현장 과학기술인 시민단체가 반드시 참여해야한다. 이는 과학기술인의 의무이자 사회에 대한 책임이다. 이 글이 TA에 대한 현장 과학기술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웅 (2004-05-11 09:49:25) 
 
아 좋은 글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통제만 받을텐가? 직장상사와 연구비 전주, 평가기관과 공무원들에게 치이는 것도 모자라 이제 비과학 시민에 의한 통제까지 '네!' 하고 달게 받을텐가."라는 구절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기영평이 제대로 되려면 당연 전문가이면서 중립적 위치에 있는 그룹이라 할 수 있는 현장 과학기술인 중심의 시민단체가 참여해야지요. 고학기술인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습니다. 
 
 
 
이웅 (2004-05-11 09:49:48) 
 
좋은 글인데 회게에도 올리시면 어떨까요? 
 
 
 
이승철 (2004-05-13 18:14:36) 
 
박상욱님 의견에 동감
사실 시민단체에서 과학을 보는 관점은 "선" 아니면 "악"이죠.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니 좋은 것도 같고 안좋은 것도 같고.
마치 종교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과학은 양날의 검이죠. 잘 쓰면 좋은 거고 못 쓰면 나쁜 거고..
그런데 사람들은 양날의 검에서 날만보고 있죠. 중요한 건
손잡이를 들고 써야하는 건데..

적극적으로 시민단체와 같이 해야겠죠. 이해가 안된 부분은 이해를 시키고 그 다음에 판단하도록 하는 거죠..
너네는 과학을 모르니 그냥 우리만 따라와 하는 태도는 과학을 더 시민과 고립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이엔지에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혹시 필요하면 저도 참여하지요. (자원봉사의 개념에서) 



2004년 5월 10일 과학기술 정책/칼럼 게시판에서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science&page=1&category=&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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