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위기와 과학기술인의 책임 - 박상욱

글쓴이
sysop2
등록일
2004-06-1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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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상욱 (2004/05/28, Hit : 592, Vote : 16) 
 
 
제목  이공계 위기와 과학기술인의 책임
 
 

이공계 지원율 감소라는 작은 ‘증상’에 의해 널리 알려진 작금의 이공계 위기는, 그 본질과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 또는 심지어 위기의 실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검증 과정조차 생략한 채 이미 상식과 같은 공공 인식의 지위에 이르렀다. 여러 언론에 의해 다루어졌고, 이공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차례 이를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흘러간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이런 진부한 주제에 대해 새삼스레 책임론을 들도 나온 이유는 책임 소지를 파악하여 응징을 가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과거의 책임이 아니다. 지금 과학기술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래서 어떻게 미래에 대해 책임을 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공계 위기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현재의 이공계 상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정부, 기업, 원로 과학기술인 그리고 교수 사회가 바로 그들이다. 70년대 ‘좋았던 시절’을 누린 분들이 지금 이공계 위기를 전파하는 데에 앞장서는 이유는 과연 후배들의 암울한 현실을 진정 함께 느끼기 때문인가, 아니, 적어도 동정이라도 하기 때문인가? 이공계 위기라는 말이 언론에 회자되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몇 년 전부터 현장에서 온몸으로 체감하고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온 젊은 과학기술인들과 과학도들은 선배 과학기술인들-심하게 말하는 혹자는 과학기술 기득권층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뜬금 없는 후배 사랑’을 고운 눈길로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다. 인문사회학계 일각에서도 지금의 이공계 위기 담론이 혹 일부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 상실 우려에 따른 방어 기작이 아닌지, 또는 기득권 강화 기도가 아닌지를 우려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공계가 위기라는데 과연 진짜 위기이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인문학의 위기와 조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공계 위기의 실체에 의구심을 갖거나 그것의 비구체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현장의 젋은 과학기술인들이 박봉과 비정규직, 위험하고 유해한 환경과 과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객관적이고도 명백한 사실로부터 실존의 근거를 갖고 있다. 나아가 불투명한 미래와 꺾여버린 희망이 그들을 완전히 녹다운시켰고 국가와 사회의 관심과 특단의 조치 없이는 자립적으로 회생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내몰리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공계 위기 그 자체이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대표적인 실용학문으로 여겨지고 있는 공학을 아우르고 있기에 이공계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와 그 성격이 다르며, 대학을 벗어난 연구현장과 기업체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 인력의 이공계 엑소더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상으로 볼 때 이공계 학문의 위기라고 볼 수 없다. 직면한 위기의 존재감과 중요성의 경중, 해결의 시급성에 있어서 타 분야와 비교하는 것은 옳지도 않거니와 필요치도 않다. 분명한 것은 이공계 위기는 국가의 위기이며 ‘국가 경쟁력’이라는 개발선동적인 말에 냉소적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조차도 경제가 뒷걸음질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공계 위기 담론은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 큰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장의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선량한 피해자이며 이공계 위기론에 불을 지펴 혹여나 얻어낼 과실의 일방적 수혜자인가? 그렇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공계에 공동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가감없이 알리는 데에 나서야 하며 해법을 찾는 데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작금의 이공계 위기가, 정부, 기업과 사회와의 유일한 언로로서 현장과 괴리된 과학기술계 상층부에만 의존해 왔기에 발생한 것이라는 인식과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나서서 해법을 찾고 또 그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면 피동적 방식으로는 무엇 하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이공계 위기에 대한 회의론을 일으킬 뿐이다. 울음을 그치고 주먹을 움켜쥐어야 할 때다.

과학기술인들은 스스로의 영역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학기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과학기술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역은 어렵지 않다. 과학기술인과 비과학기술인들과의 사이에는 심각한 소통의 문제가 존재하고, 혹자는 ‘언어가 다르다‘고 평할 정도이다. 과학기술 전공자는 반드시 연구개발자나 기술직에 종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과학기술 마인드를 가지고 진출할 분야는 부지기수이다. 공직은 물론이거니와 금융, 문화 등 다양할 뿐 아니라 제한이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월가에는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고, 선진국은 대사관이나 문화원에 과학기술인을 반드시 한명 이상 내보낸다. 이공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과학기술인이 다양한 길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공계 내에서는 다른 분야로 진출한 과학기술인을 낙오자인양 경원시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지양되어야 하며,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과학기술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널리 퍼지는 것이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방향이다.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직접 나서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흔히 과학기술인이 과학 대중화에 나설 것을 책임의 일환으로 요구하는데, 과학 쇼를 하고, 쉽게 과학을가르치고, 그리하여 과학 문화를 전파하는 것만이 과학 대중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대중의 과학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이해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역시 지양되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과학의 대중화’는 과학기술인의 대중 사회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어떤 사회적 쟁점이 있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사안에 대해 과학기술 지식을 갖고 있는 과학기술인들이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 분야의 전문인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이다.
 

2004년 5월 28일 과학기술 정책/칼럼 게시판에서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science&page=1&category=&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31

  • 임호랑 ()

      '과학의 대중화'에 대한 해석이 특히 압권이군요.
    이 글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이제 이공계 대학 진학 목표를 연구원이나 교수, 회사원되는 것으로 국한하는 좁은 소견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기를 바랍니다.

  • 토토 ()

      과학의대중화라는 말, 저는 이제 갓 이공계 대학에 들어온 공학도지만, 상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 김석주 ()

      과학의 대중화는 매우 좋은 의미이군요.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의 결집된 힘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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