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Human-Built World by Thomas P. Hughes 그리고 번역판

글쓴이
박상욱
등록일
2008-08-0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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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휴즈는 미국의 저명한 기술사학자이다. 그의 '기술시스템이론'은 과학철학, 과학기술학(STS)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정책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휴즈는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 출신으로, 기술사학자로 변신한 뒤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린 저작은 'Networks of Power' 로, 전기 기술시스템 초기의 모습을 상세한 실증자료와 함께 분석하여 '대규모 기술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것이다. 어떤 기술이 사회와 융합하다시피 정착하고 대규모 인프라가 구축되며 산업화를 수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 이에 대해 할 얘기가 더 있으나 너무 전문적이라서 여기서는 생략-

토머스 휴즈의 업적은 이후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SCOT)' 붐을 일으켰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 SCOT 열풍과 뒤이어 등장한 행위자연결망이론(ANT) 덕분에 7~80년대 잠시 유행했던 과학적 지식의 사회학(SSK)이나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구성론 같은 것들의 입지가 급속히 축소된 것이다.

나는 토머스 휴즈의 깊은 내공과 성찰을 대단히 존경한다. 그의 저술들은 일반적인 과학기술인이 보기에는 다소 진보적이지만,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중립적이며, 과학기술의 가능한 부작용이나 공공인식(및 참여)에 관한 그의 지적들은 '받아들일만 하다'.

서설이 길었다.

'Human-Built Wold: How to think about thechnology and culture' 는 휴즈가 대중을 대상으로 쓴 얇은 책이다. 제목도 소프트하고,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담담하게 쓰여 있는데, "기술이 세상을 이렇게 좋게 바꾸었어요!" 류의 '과학도서'는 전혀 아니고, 기계문명과 사회변화, 사회사상과 문화 등에 대해 밀도 있게 쓰여 있는데, 전문서가 아닌 대중서로서 가독성도 높고 복잡한 얘기도 거의 없으며, 섹션도 짤막짤막하게 되어 있고 풍분한 자료사진이 곁들여져 있다. 몇년 전 영국에서 읽고, 주변에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초보' 일반인들-주로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하거나 빌려주곤 했다.

이 책이 금년 초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글로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바로 구입했다. 뜬금없이 이 소개글을 쓴 이유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올라서이다....


옮긴이는 번역을 업으로 하는 분으로, 기술시스템에 대한 전문성은 없었다. 그건 이해할 만 하다. 어차피 휴즈를 이해하는 사람은 국내에 몇십명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번역 자체도 매끄럽지 않은데, 이것은 아마도 내용과 어휘가 좀 어렵다 보니 아예 직역식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 싶어서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린 것은 직역된 문체가 주는 짜증이 아니었다. 옮긴이는 휴즈의 글을 의도적으로 '부정적으로' 옮기고 있었다. 휴즈의 글에 (기술에 대해) 다소 네거티브한 어휘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어로 읽을 때에는 전혀 거슬림 없이 읽었던 글을 한글로 읽으니 이것은 완전히 반기술(안티-테크놀로지) 서적이 되어 버렸다. 기술사가로서 휴즈 특유의 관찰자적 시선은 사라지고, "기술이란 인류에게 이만큼 나쁜 것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식으로 되어 버렸다. 결국 나는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해 보았고, '직역'에 가까운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소제목을 교체하고 일부 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국역본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져 버린 것을 발견했다. 일일히 사례를 끄집어 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제목부터가 "(원제 완전 직역) 인간이 세운 세상- 기술과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로부터
"(번역판 제목) 테크놀로지, 창조와 욕망의 역사" 로 바뀌어 있다. 욕망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좋지 않다.

소제목 중에서는 'Systems, controls, and information' 을 '시스템의 통제가 정보혁명을 일으키다'로 바뀌어 있다. 기술시스템과 그 컨트롤로부터 IT 기술의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 사족하자면 예를 들어 철도 시스템, 전기 송전 시스템을 컨트롤하기 위해 전신이나 전화가 발달했다는 기술사적 관점은 잘 알려져 있다.-  얘기가, 국역본에서는 'IT혁명은 시스템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도록 되어 있다. 거대권력의 사회에 대한 감시통제체계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소제목의 변질은 부지기수라 일일히 예를 들기를 포기한다. 본문에서도 결과적으로 '강하게 부정적으로 갔다가 담담했다가', '기술이 인류에 공헌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가 갑자기 나쁘댔다가' 하는 바람에 가독성이 극히 떨어진다. 


한국 사람들 중에 일부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이나 부작용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의식있는' 시민인양 여기는 풍토가 자리잡은 듯 하다. 물론 외국에도 그런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중심을 잡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에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대형 서점에 가서 '과학 일반' 서가를 보면 절반정도는 청소년용 과학도서나 논술교재이며, 나머지 중 지나치게 많은 책들이 과학기술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주제의 책들이다. 기후변화를 포함한 환경문제 등에 있어서도 합리적, 전략적 대응보다는 감성적, 반과학기술적, 반개발적 대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나는 문득, "(휴즈의 책과 논문들을 여럿 읽은) 내가 지금까지 휴즈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가? 휴즈는 반기술주의자인가?" 하는 섬뜩한 우려에 사로잡혔다. 옮긴이의 해석이 맞고, 내 해석이 틀린건가? 그 답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판단해 주기 바란다. 번역본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가져온다.

휴즈:

"...나는 먼저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물론 엔지니어링과 테크놀로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도 했지만, 나는 그 안에 잠재된 긍정적인 힘을 믿었다. 그래서 종종 엔지니어링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그것을 싱행하는 사람들에게 열광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반문화주의 비평가들과 환경보호론자들, 환경사 연구자들을 통해 테크놀로지의 상반된 두 얼굴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테크놀로지에 대한 열광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나의 저작들에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나는 테크놀로지를 창조적인 활동으로 규정하고, 테크놀로지를 신적인 영감의 증거로 여기는 이들에게 기꺼이 공감하고, 기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는 도구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나의 이런 적극적인 동조는 테크놀로지의 비판자들로부터 배운 것에서 크게 범위가 벗어나지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 한반도 ()

      저도 먼저 국내에 들어온 원서를 구해서 읽어본 다음에 번역본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봐야겠네요.

    근데 박상욱님의 번역자에 대한 설명이 없네요. 신중을 기하시는 것도 있겠지만, 혹 그간 그 번역자가
    출간한 책들에 대해 아시는 정보라도 있으신지.  여튼 저도 한번 그 역자에대해서 알아봐야 겠네요.

    박상욱님의 의견에 따르자면, 분명 그 역자만의 '의도'가 있다는 걸로 해석이 되는데, 저도 지금
    대체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단순히 기술공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번역의 난점이 있을리는 없을 것 같고...

  • 돌아온백수 ()

      음....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그 정도라면, 번역이 아닌데 말이죠.
    오늘 도서관에서 원본부터 찾아보겠습니다.

  • 한반도 ()

      여기 좋은 게시물을 모아놓은 게시판을 보면 2004년에 관전평님이 '사라짐'에 대한 과학기술을
    얘기하면서 SF가 한국에서는 '공상과학소설'로 번역되는 아쉬움을 토로한적이 있네요.

    한국에서 번역과 용어선택에 있어 나름대로 앞서간다는 분들이 가지는 인식의 연장이 아닐까요.
    <a href=http://www.scieng.net/zero/view.php?id=best&page=1&category=&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7 target=_blank>http://www.scieng.net/zero/view.php?id=best&page=1&category=&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7</a>

  • 박상욱 ()

      그냥 제 생각에는, 번역자가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번역자는 언론계 출신입니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 중에 국내 과학기술운동계 사람들이 있어서 과학기술 관련 서적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야만 하는 것으로 착각했거나, 번역에 앞서 유사분야 번역서들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했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참고하다보니 '그런' 책들을 많이 보게 되어 별 생각 없이 용어와 분위기를 맞춘 것 같습니다.

    번역자의 악의적 의도가 가해진 수준은 아니고, 토머스 휴즈의 책이 '원 옵 그런 책들'이 되어 버린 정도입니다.

    다만 이런 작은 사례를 통해서, '과학기술에 관한' 서적 중에, 또 국내 관련 학계에 '지나치게' 안티사이언스 기조가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 언제나 무한도전 ()

      읽어보겠습니다.
    이 업계의 문외한으로서 이런 글 자주 올려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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