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기업이 먼저 변해야 한다" [04.04.09/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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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등록일
2004-04-1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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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먼저 변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과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탈이공계 엑소더스는 대학, 연구기관, 산업체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과학기술계를 총체적인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학에서는 진학률 감소와 우수 학생들의 대거 이탈로 이공계 대학원이 공동화로 치닫고 있고, 산업체에서는 쓸 만한 인재를 구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푸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기술의 ‘암흑기’가 올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반도체와 LCD, 휴대전화, 자동차 등 주요 수출품으로 지금껏 이 나라를 먹여 살려온 이들이 바로 민간기업에 종사하는 과학기술 인력들이었던 만큼, 산업 현장에 우수 인력이 없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이공계 대학이 당장 현업에 투입할 만한 기술인력을 길러내지 못했다면서 이공계 대학의 교육 수준과 내용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거나 해외 이공계 인력의 채용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들의 상황진단과 문제제기가 대부분 맞는다 하더라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과 위기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과연 누구이며, 가장 큰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일 수 있고, 보는 이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체들이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IMF 구제금융시대에 가장 먼저 내쫓긴 것이 바로 기업체의 연구개발 인력들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또한 기업체들이 과연 우수한 이공계 인력들이 마음껏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 주는지도 매우 의문스럽다.

물론 민간기업의 연구개발은 수익창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구개발의 기본특성에 대한 이해도 없이 항상 목전의 이익과 단기간의 성과에만 집착해 지금처럼 기초기술, 원천기술의 개발에 소홀한다면, 유능한 과학기술 인력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 더 나아가 장래에 더 큰 이익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소탐대실의 상황에 치닫고 만다. 심지어 “기술은 그냥 사다 쓰거나 적당히 베껴오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개발하는가?”라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처럼 기업 경영자들은 연구개발의 중요성과 과학기술의 가치에 무지한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인 것이다.

트랜지스터, 반도체 집적회로, 나일론 등 세계 최초의 새로운 과학기술이 주로 민간기업에서 나왔던 미국이나, 기업체의 평범한 연구원이 연구개발에만 매진해 노벨상까지 받게 되는 일본의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다운 연구개발’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하다.

국내 기업들의 이러한 척박한 연구개발 환경은 과학기술 인력을 지속적으로 육성시켜야 할 소중한 ‘인재’로 보기보다는, 싼값에 실컷 부려먹고 용도가 다하면 언제든 폐기처분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풍토와도 직결돼 있다. 백발의 프로그래머나 할아버지 연구원들이 즐비한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 기업의 연구소에서 40대 후반을 넘긴 현역 연구원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어떤 이들은 고액 연봉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몇몇 스타급 이공계 출신 CEO들을 들먹이면서 청소년들에게 이공계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경영자’로서 성공한 것이지,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몇만 명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스타 CEO보다는, 오래도록 연구개발 현업에 종사하면서 성과와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존경을 받는 ‘마스터급’ 연구원들이 기업에 많아질 때 이공계 기피현상은 해결될 것이다.

이공계 박사의 70% 이상이 대학에만 몰려 있다면서, 우리나라 우수 인재들의 지나친 대학 선호 풍조를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업 연구소가 오래 머물면서 연구개발을 할 만한 곳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면, 대학은 더 이상 우수 이공계 인재의 ‘블랙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30, 40대 초반의 유능한 기업체 연구원들이 뒤늦게 살길을 찾고자 고시공부를 하고 의·치·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수능시험을 다시 보는 국가적인 낭비도 불식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 기업들이 그동안 이공계 기피현상과 위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가해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과학기술 인력들을 소모품이 아닌 인재로서 대우하려는 ‘윈-윈’ 태도를 가진다면, 장차 이공계 기피현상의 해소에도 큰 실마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업 스스로도 살아나갈 수 있는 상생의 길이 될 것이다.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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