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진중권] 인문학 위기에 관하여

글쓴이
성백경
등록일
2003-02-02 13:30
조회
5,3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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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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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점에서 대학이라는 제도의 기능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학을 바라보는 내 관점은 아직까지도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다. 즉 나는 그저 공부가 재미있었고, 공부로 밥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기에 가능하면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나름대로 제도권에 편입되기 위해서 무던히 애도 썼다.

하지만 제도권은 이 처절한 노력을 몰라준다. 제도권이 얼마 안 되는 내 자존심마저 포기하기를 요구했을 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후 대학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요즘은 '공부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라는 선입관을 반박해주는 가능성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생활이 불안정하기는 해도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자유과 생활의 여유가 있다. 요즘 나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대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몸뚱이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 인문학은 위기여야 한다 ::

 한때 '인문학의 위기'라는 아우성이 있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대학제도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논리를 도입해서라도 상업적 경쟁이라도 강요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위기이다. 물론 인문학에 경제적의 가치를 생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이 사회적 현실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제 고민을 발전시켜왔다면, 지금처럼 '통폐합을 해도 문제없다'는 식의 모욕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인문학은 제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학문이란 이전 세대의 한계를 깨고 나아갈 때 발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아탑에서 그런 것은 어차피 금기다. 그 결과 지식의 시장에서 묘한 독과점의 지배가 형성된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지적 도전을 할 시기에 한국의 대학은 순응의 지혜부터 가르친다.

한국의 대학은 현실과 별 관계가 없다. 그곳의 논의는 현실에서 올라온 고민들이 이론으로 결정화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식은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하우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신분을 사회적으로 구별짓는 기호일 뿐이다. 현실에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지식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왜? 현실에서 검증될 기회가 없는 지식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매치되지 못한 개념은 추상성을 벗을 수가 없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쉽게 표현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고차원적으로 사고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자기가 말하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증의 위험이 없는 추상의 높은 수준에서 발언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 잡스런 논문 vs 꿰뚫는 잡글 ::

 대학 밖에서 내가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는 문체의 자유다. 처음에 여기저기에 잡글을 쓸 때는 그저 생활의 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다양한 주제로 산발적으로 쏘아댄 그 쪼가리 글들이 외려 높은 추상의 차원에서 노는 고상한 글들보다 어쩌면 현실을 더 잘 비추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잡글들은 그 하나 하나를 보면 현실의 파편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논문이라는 형식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현실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큐비즘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벤야민이 말하는 '분산된 지각'의 효과...(요즘은 벤야민을 읽는다. 나는 그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유, 그것을 할 자유, 그리고 최소한의 자존심. 그것을 찾아 나는 대학 밖으로 나와야 했다. 내 잘못일까?

진중권 [문화평론가]

  • 소요유 ()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의 문제를 지적한 부분은 과학이나 공학 이라고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 황인태 ()

      과학이나 공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소유유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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