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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심슨, 라쇼몽 그리고 황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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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sh 작성일2005-12-0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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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식축구 영웅 OJ 심슨이 전부인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총증인만 125명에다가 '꿈의 변호인단', 엄청난 취재 경쟁 등 많은 부분이 화제가 되었지요.

특기할만한 것은 재판 과정 중 백인경찰의 인종 차별 발언이 밝혀지면서 살인 사건 재판이 인종 문제로 비화된 점입니다. 실제로 백인의 78%는 심슨이 유죄라고 믿었고, 흑인의 71%는 심슨이 무죄일 거라 믿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배심원 교체를 겪는 진통 끝에 흑인 9명, 백인 2명, 히스패닉계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무죄를 평결하였지요. 재밌는 것은 바로 다음에 진행된 민사 재판에서는 같은 사건, 같은 증거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OJ심슨은 유죄를 선고 받았고 총 3350만불을 피해자 유족들에게 배상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의 형사 재판과 달리 민사재판에서는 12명의 배심원 중 9명이 백인이었고, 전원 만장 일치가 아니어도 평결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판사가 재판 중 인종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했다고 하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인종 문제가 다시 한번 부각되었고, 미국의 사법 제도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영화 라쇼몽.
사무라이와 아내가 숲을 지나다, 아내는 산적에게 겁탈 당하고 사무라이는 칼에 맞아 죽어 발견됩니다. 산적이 잡히고 각자가 사건에 대해 진술하지만, 세 사람 모두의 진술은 엇갈립니다. 결국, 현장을 목격한 나뭇꾼에 의해 진짜 진실이 밝혀지지요.
명백해 보이는 사건의 진실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어떻게 윤색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지요.

세상사 새로운 일 없습니다. OJ 심슨 재판과 영화 라쇼몽에서 벌어진 일은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도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윤리 문제와 실험 결과에 관한 진실은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난자를 구하는 과정이 규정과 통념에 따라 양심적으로 진행되었는가?"
OJ 심슨 재판이 살인 사건 재판에서 인종 문제로 바뀌듯이, 규정 준수의 여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국익을 위해 황우석 교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둥, 외국의 윤리를 우리가 따를 필요가 있냐는 둥 엉뚱한 말들만 많았지요.
PD수첩팀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미즈메디 병원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IRB와 박기영 보좌관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에 속합니다. 적절한 후속 조치가 있어야겠지요.

"논문의 실험 결과는 재연 가능한가?"
1차 실험 실패 후, 실패 원인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PD수첩 팀을 탓하고, 다른 분들은 황우석 팀을 탓했지요. 검증 실험을 대하는 자세 역시 어떤 사람들은 황우석 교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로 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로서 당연히 응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황우석 측에서 재실험을 거부하는 동안, 서로 간에 빚어진 갈등은 혼란 그 자체였지요.
제 생각으로는 황우석 교수 측에서 처음부터 거부했으면 모를까, 일단 PD수첩팀과의 검증 실험에 동의한 이상,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타 실험실에서의 재연 실험에 적극 협조하여 자신들의 논문에 문제가 없음을 속히 증명했어야 옳습니다. 영화 라쇼몽에서 현장을 죽 지켜본 나뭇꾼의 진술로 모든 진실이 드러나듯이, PD수첩팀이 내세우는 실험실이 아닌 다른 공신력 있는 제3의 기관에서 재연 실험에 성공했다면 모든 논란을 단숨에 잠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혹은 제기되었는데 검증이 되지 않은 지금은 찜찜한 마음만 남았습니다. 막판에 터진 사진 문제는 제 찜찜함을 한층 더 해주었지요. 어리버리 PD수첩팀에게 짜증나는 만큼 황우석 팀에게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OJ심슨이 같은 사건에 대해 형사재판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유죄를 받았듯이, 황우석 교수는 한국 대중에게는 여전히 영웅으로 남겠지만, 전세계 과학자들에게는 뭔가 시원스럽지 않은 과학자로 남게 됐습니다.

이제 PD수첩의 무리한 취재 방식으로 인해 모든 논란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지금, 제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간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까지 간 다음에야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하는 모습. 그리고, 간단하기 짝이 없는 반복 실험을 거부하며 사리에 맞지 않는 설명만 늘어놓는 모습 이 두가지입니다. 특히, 사이언스 공동 저자! 노성일 이사장의 '줄기 세포는 분화 중이라 DNA 변이가 있다'는 설명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논란도 아니고 과학적인 논란에서 OJ 심슨 재판식 엉뚱한 문제 제기나 영화 라쇼몽식 주관적 판단이 홍수를 이룬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 와중에 과학한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중심을 못 잡은 것은 정말 정말 슬픈 일입니다. 우리도 칼 세이건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이 중심을 잡아줄 과학자, 그리고 전문성 있는 '진짜' 과학 기자를 갖게 될 날이 오길 바랍니다.

댓글 6

고양이님의 댓글

고양이

  좋은 말씀입니다.. 스스로도 정확히 표현 못하던 제 마음속의 말들이 이렇게 정리가 되는군요.. 이제 일을 할 수 있겠네요..

한반도님의 댓글

한반도

  그렇게 자주 많이 쓰시는 분은 아니지만
님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상황판단을 하기에
좋은 글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전에 님께서 말씀하신
'fact'에 관한 얘기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네요.

큰소나무님의 댓글

큰소나무

  그런데 솔직히 그 재연이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얼추보니 그 손맛이라는게 무척이나 중요해 보이는데 수십명의 연구원 중 실제로 그 손맛이 되서 난자를 직접 건드려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미국에 있는 연구원이 귀국안한다고 기술유출이니 뭐니 하는 말도 나오는 것 같고요. 옆에서 보고도 그대로 못 따라하는게 실험이잖아요.-_- 이것참 내 손 스킬이 좋다고 자랑하다간 출국금지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물론 제게 그런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말이죠.

Pasquina님의 댓글

Pasquina

  재연 요구가 아닌 DNA재검사 요구 아니었나요? 재연은 황우석 팀에서 나온 얘기였던거 같아서요.

숨쉬는 바람님의 댓글

숨쉬는 바람

  잘 쓰셨네요. 백분 공감합니다. 퍼갑니다. ^^

일반인님의 댓글

일반인

  글 잘쓰셨네요. 국어공부도 열심히 하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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