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아내로 산다는 것 - 임지수

글쓴이
sysop2
등록일
2003-05-2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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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임지수
 
제 목    과학자의 아내로 산다는 것
 
근래들어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집은 부부가 모두 이공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화학/화공이라는 3D쯤으로 여겨지는 분야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남편이 5년의 병역특례를 끝내고, 공부를 더하겠다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로 갔다. 뉴스에 이공계 박사실업자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때에 학교로 간 것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끝나고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남편은 학위과정 4년동안 "너, 나한테 박사받으면 뭐할거냐고 묻지마"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냥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았고, 남편의 어린시절 꿈이었던 과학자의 소명의식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과학이, 그리고 그 과학이 바탕된 산업기술이 한 국가의 기본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공부한다는 남편이 좋았다. 앞으로 남편이 나에게 다시 월급을 갖다주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보람있는지를 알고 노력하는 남편이 믿음직했다.

나름대로 가치관을 세운 우리 부부에게도 씁쓸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몇 년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전자과 박사과정인 남자한테 그 약혼녀가 울며 매달린다. "너 머리 좋고 똑똑하니까 사법시험 준비해. 내가 뒷바라지 해줄게. 우리 부모님이 과학자는 안된데."라는 대사를 읊조리면서... 그때 응용화학부 박사과정이던 남편은 "칫, 요즘 제일 잘나간다는 전자쪽이 저러면, 화학은 어쩌라는 거야."라며 씁쓸해 했다.

또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미국으로 나간 선배나 친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다. '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고급 과학인력의 채용규모가 크게 감소한 것은 물론이고, 연구환경이 더욱 열악해져(연구시스템, 연구장비 등) 정상적인 연구활동이 어렵다는 것이 너무 쉽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왜 강국인가, 그것은 전세계의 고급인력(과학/경제/문화/교육 등 사회 기반분야에서)이 바글바글 모여들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같은 후발공업국에서 선진국으로 인력을 무상지원 하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를 뽑아 돈을 들여 키워서, 선진국에 바치는 이러한 현실이 너무 답답한 일이다.

이공계 공부가, 과학자의 길이 얼만큼 많은 노동이 필요한 것인지... 박사과정에 들어간 남편의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3∼15시간은 되어 보인다. 토요일도 5시는 넘어야 오고, 일요일을 제외한 공휴일도 대부분 학교에 간다. 올해 중순 미국의 한 대학 Post-Doc.과정(박사후 연수과정)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남편은 요즘 새벽에 영어학원까지 다니면서 노동시간이 16시간을 넘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의 과부다. 다행히 친정부모님이 옆에 계셔서 의지가 되지, 나는 딸과 둘이 사는 과부같다. 우리 친정부모님은 답답해 하신다. 박사 받고서도 그러면,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고... 우리 부모님은 이공계 박사학위가 무슨 자격증 같은 것인줄 알았나보다. 그걸 받으면 좀 편하게 살 수 있는... 크게 잘못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얼마만 있으면 나는 만 11년이 조금 넘은 회사생활을 접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같다. 주변에 알고지내는 상당수 이공계 출신 지인들은 우리에게 돌아올 생각 하지말고 그곳에서 살라고 충고한다. 자식을 멀리 두고 싶지 않으실텐데, 양가 부모님도 모두 미국에서 그냥 살라고 말씀하신다. 환갑이 훨씬 넘은 부모님들도 우리나라에서 과학자가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는 것일까?
우리 부부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다. 아니, 유혹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면서(특히 자식 교육때문)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면 안돼라고 다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꿈을 가진 과학자로 산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님 덕분에 먹고사는 것이 걱정 없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는 유혹속에 자기다짐을 반복하며 자기를 곧추세워야 하는 일이다.

--- 이 글은 3월 8일 Ohmynews에 올렸던 글입니다.


 
 

  계명하 슬픈 내용의 글이지만,,,,, 저런 여자랑 같이 살면, 정말 정말 행복할 겁니다. T.T  2003/03/10 x 
 
  song 요즘 학위하시는 분들중에 결혼 안하신 분들이 점점 많은 거 같습니다. 아마도 타의에 의한 독신이 많을 줄 압니다. 솔직히 돈을 많이 버는것도 아니며, 시간이 많아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직업 안정성이 좋은것도 아니며, . . . . . 옛날에 그나마 있던 고급인력 채용도 윗글처럼 많지 않은듯 싶습니다.  2003/03/10 x 
 
  최희규 삽십대 중반에 학위과정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공감이 가구요... 8월이면 아빠가 되는 현실에서 외국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지인들의 이야기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는 과학기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사랑합니다... 하지만 선배 아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식사랑이 그 어떤 것 보다도 우선이라고 합니다. 저는 똑바르게 올 곧게 내 자식을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자신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큰일 입니다... 돈 좀 적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저의 능력(?... 마땅한 단어가 안떠오르는 군요)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겟습니다... 2003/03/10 x 
 
  트리비어드 이공계 남자는 이공계 여자하고 결혼하는게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아니면 누가 우리 처지를 이해하리오...^^; 젊은 고딩 숙녀들이 이공계에 많이 오길 바랄뿐이죠. 그런데 이공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데 왜 일반인들은 과학자의 실상을 저리도 모를까요? 그것 참...우리가 다수인지 소수인지 분간이 안갑니다. 2003/03/10 x 
 
  백수 참 좋은 글이네요. 그 뜻이 꺽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수단과 목적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가는 언제나 수단일 뿐이죠. 산다는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 않나요? 생이 끝나갈 무렵, 돌아보며 스스로의 궤적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을 찾으시리라 믿습니다.  2003/03/10 x 
 
  JohnCage 달걀은 나눠 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로선 다만 제 능력으로는 참한 비이공계 아가씨에게 손을 내밀기 어려운 현실이 괴로울 뿐. 2003/03/11 x



2003년 3월 10일 회원자유게시판에서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now&page=36&category=&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36

  • b.k. ()

      능력있는 과학기술자들을 해외로 내모는 현실이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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