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論 - (2) 그림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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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y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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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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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배연 (indiyoo)

작성일 2004-03-02 07:39:20 조회 423 추천 14

제목 그림論 - (2) 그림論


본문 '나는 내가 아니에요'

이 짧은 한 마디가
앞으로 우리 사회는 물론

인류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2부를 시작하기 전에,

1부에서 당신에게 드린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신은 평생을 '나는 나예요' 하고 살았습니까?
아니면 평생을 '나는 내가 아니에요' 하고 살았습니까?

이 짧은 질문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째는, 순간 어리둥절해지면서 아찔해집니다.
그리고는 곧 알게 됩니다.

바로 나 자신이 평생을 '나는 내가 아니에요'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또한
바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늘이 무너지듯
심각해집니다.

두 번째의 반응은,
이게 무슨 말이야!, 무슨 귀신 나락 까먹는 소리야!
할 수도 있겠고,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군
하면서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의 반응은,
잠시 '생각'을 한 후에
'나는 나지, 나는 나예요 하면서 살았어'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여기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모든 정신질환과 대부분의 신체질환의
공통된 원인이 애정결핍으로 인해 생긴
열등감입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이란 게 과연 무엇이고,
또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날까요.

먼저 열등감의 뜻과 정의를 다루기 전에
이것의 원형인 자신감의 뜻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자신감이 있는 사람입니까?

이어 다시 물어 보십시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왜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두 가지가 바로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이거나 '아니다'이거나 간에
다음 질문을 합니다.

언어(言語)의 일반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묻고 다른 한 사람이 대답을 했다면
이 두 사람 모두가 그 단어의 뜻을 같이 알고 있거나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질문을 합니다.

자신감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지적 능력이나 학력으로 볼 때
최상위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어를 전공한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대답은 하나 같이 동일합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을 자신감의 뜻으로 다들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코멘트 합니다.

대략 20년 가까이를 교육받았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감의 뜻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뢰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습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우리 모두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우리 사회의 양육이고 교육입니다.

하지만 자신감의 뜻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은 미친 것입니다.
과대망상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는 영장일 수 있겠지만,
역시 극히 제한된 능력을 소지한 존재일 뿐입니다.

3층 건물에서 떨어져 손 끝 하나 다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63빌딩에서 맨몸으로 떨어져 살 수 있는 사람 또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감의 뜻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 땅 위에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게 됩니다.

자신감의 정의는
'나의 있는 그대로를 알고자 하고,
알게 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지나 태도'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안에
무엇인가를 잘한다는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 무엇을 잘하면 자신감을,
반대로 못하면 열등감을 갖게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을 하는
즉 극심한 열등감으로 자살을 택하는 학생들의 성적분포는
놀랍게도 대략 2등에서 15등 사이입니다.

극심한 열등감으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학생들이
사실은 '열등'한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우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등한 것과 열등감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림을 통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를 직접 대입해 보겠습니다.
나는 자신감 있는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림1




'나의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내 주관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바로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를, 나의 면모를
4,700만 대한민국 사람들 안에서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주 위의 무수한 점들이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모든 속성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거나 큰 것이 +5이고,
반대로 가장 짧거나 작은 것이 -5입니다.


(1)은 내 정신과 의사로서의 능력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능력은 일반적으로도
정신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모든 정신과 의사가 정신과 의사가 아닌 사람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차는 그리 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정신과 전문의가 대략 2,000명이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내 정신과 의사로서의 능력은
+4.99일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불과 4개월 동안에
단지 상담만을 통해
두 사람의 정신분열병 환자를 영원히 완치시켰다면
그 수치는 +4.9999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2)는 내 영어 실력입니다.

의과대학에서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어원서를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영어 실력이 평균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영어교육이 그러했듯이
단지 문법이 위주일 뿐
hearing을 포함해 영어로 회화를 하는 것은 매우 짧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회화를 포함해서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500만 명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실력은 +4입니다.


(3)은 내 신장(키)입니다.

고등학교 3년간 내 학번은 이렇습니다.
10606, 20808, 그리고 30716.

1학년 때는 6반이고 6번입니다.
당연히 1번이 키가 제일 작습니다.

3학년 때는 조금 더 커서 16번이 됐지만
60명 중에서 16번은 하위 1/3을 넘지 못하는 수치입니다.

그래서 내 신장(키)의 수치는 -3입니다.


(4)는 주먹 싸움 등 격투 능력입니다.

어려서부터 겁도 많고,
싸움을 두려워했었습니다.

이를 극복해보려고 중학 때는 유도를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태권도도 배웠습니다.

이것으로도 되지 않아
한 때는 공부는 나보다 떨어지지만
깡다구 좋고 싸움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필요한 경우라면
그냥 맞아 죽지는 않을 것이고,
나보다 더 싸움을 못하는 남자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4입니다.


결국 이러한 나의 여러 속성에 대해 끝없이 알고자 하고,
알게 된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이러한 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감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예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감입니다.



다음이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의 정의는
'나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보다 낮게 평가하는 태도'입니다.

그림2입니다


그림2


내가 만약 열등감만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치료를 받고 건강해져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 때 내가 열등감만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누구라도 하면 이 정도는 다합니다.
정신과 전문의가 2,000명이 있는데 나는 중간에도 못가요...'

나는 환자들이 진료실로 들어올 때 매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키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키높이 구두를 신을 것입니다.

이런 작은 키를 만약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죽도록 괴로울 것입니다.

'이게 사람 키야, 난쟁이 똥자루지...'

이게 열등감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게
바로 이 열등감과 죄책감입니다.

그래서 열등감을 갖게 되는 모든 사람은
열등감을 갖게 되는 즉시 이와는 반대 모양의 허상을 그리고
그 허상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월감입니다.

이렇게 해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으로부터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3입니다.


그림3


자신의 실제와는 전혀 다른
허상을 자기 멋대로 그리고는
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나인데,
'이런 나는 내가 아니에요, 저런 내가 나예요' 하는 것이고,

나는 나인데,
'나는 내가 아니에요'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지금까지는 대략 어떤 질병이나 증상이 없고,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의 식대로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안녕(well being)한 상태 정도의
추상적인 표현이 모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확실하고 간단한 정의가 생겼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의 정의는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고,
또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단어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곧 '자신감, 신뢰 그리고 사랑'을 뜻합니다.

나를 나라고 하는 것이 자신감이자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너를 너라고 하는 것이 신뢰이자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아직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이어서 자신감과 열등감 그리고 우월감 각각의
생성과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생기는 것이길래
한 번 생기면 평생을 기를 쓰고 안달을 해도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걸까요.

또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길 원하고
이를 위해 죽어라 노력을 하는데도
왜 자신감이란 게 좀처럼 생기지 않는 걸까요.

그 생성과정을 보겠습니다.

먼저 건강한 경우로서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림4입니다.


그림4


설명에 앞서
자신감을 앞에서 정의했듯이
'신뢰'라는 단어를 먼저 정의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를 신뢰하십니까?

흔히들 신뢰라 하면
바로 그 대상에 대해 좋게 또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잘못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
그 말을 전해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네가 잘못 봤을 거야, 나는 내 남편을 믿어.'

하지만 이 부인은 남편을 신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뢰의 정의는
'그의 있는 그대로를 알고자 하고,
알게 된 있는 그대로의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지나 태도'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신뢰라는 단어의 정의에
어떤 식으로든 좋은 쪽으로 본다거나 '생각'한다는 내용은 결코 없습니다.

알고자 해서 그 결과 그 사람이 도둑임을 알았다면,
'나는 당신을 신뢰한다. 당신은 바로 도둑이다.' 하는 것이
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림4를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평생을 건강하게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의 여부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냐 에 따라
100% 수동적인 상태에서 결정이 됩니다.


즉, 부모가 자신감 있고, 신뢰를 알며 또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부모의 아이들 역시 같은 사람이 되고
평생을 건강하게 살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4는 건강한 부모로 인해 그 아이 역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먼저 이 아이의 아빠는 자신감 있고 또 신뢰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고 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이어 부인을 만나서도 그의 있는 그대로를 알고자 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배우자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엄마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이 역시 신뢰로 대합니다.
아이에 대해 끝없이 알고자 하고,
알게 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는 신(神)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이 부모에게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神)과도 같은 부모가 자신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는 것을,
'자신을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부모의 마음'을
항상 느낍니다.

이어서 자신에 대해 알게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주는 부모의 마음 역시 동시에 느낍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점차 자라면서
마음의 움직임 즉 호기심과 관심에 따라
자신에 대해 궁금해지게 되고 또 알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고,
이어 알게 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神)과도 같은 부모가 기꺼이 받아준 자신을
자신이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이는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이 아이는 이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알고자 하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알게 된 있는 그대로의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아이는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또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평생을 이러한 건강한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로서
그림5입니다.


그림5


아빠는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
우월감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엄마 역시 아빠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열등감이 얼마 만큼이고,
또 이를 위장하기 위해 만든 우월감이 얼마만큼일 때,

바로 이 사람은 자신 만큼의 이성을 만날 경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왠지 마음이 끌리고 빠지게 됩니다.

흔히 사랑을 하고 또 결혼을 할 때는 눈에 뭔가가 씌워진다고 합니다.

이 말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그만큼의 열등감을 마찬가지로 그 반대가 되는
그만큼의 우월감으로 위장한 사람은,

바로 같은 크기만큼 열등감과 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과
서로 공명(共鳴, Resonance)을 일으킵니다.


초등학교 때 소리굽쇠를 이용하여
공명 현상을 실험했던 기억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부부들은
인물이나 학력 또는 경제적 상황은 전혀 다를지라도
바로 정신적으로 얼마만큼 건강하거나
또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냐에 따라
똑같은 사람끼리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펴봐야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부부는 왜 정신적으로 같은 사람끼리
결혼하게 되어 있는 걸까요?

여기에 심오한 자연의 섭리가 있습니다.

자연의 보편적 원리는 인과론일까요?
그래서 인과응보이고 권선징악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의 원리는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서 자신의 과제를 마칠 수 있도록
끝없이 기회를 주고
끝없이 안내를 해줍니다.

즉 똑같은 사람끼리 결혼하도록 되어있는 것은
바로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자신의 실제모습을
이제는 배우자라는 거울을 통해서 올바로 보고

그 거울에 비친 바로 자신의 모습을
이제는 받아들이라고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9부터 +1인 사람(열등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괴로워 -1부터 +9인 것으로 위장(우월감)을 합니다.

이 사람과 공명을 일으키는 사람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면 오래지 않아
상대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실망을 합니다.

전에는 -1부터 +9인 것으로 봤는데 그게 아니구나,
넌 -1부터 +9라고 했잖아, 그런 척 했잖아, 그렇다면 나를 속였구나...등등.

이 사람이 본 것은 바로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매한 사람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그것은 바로 너야'만을 할 뿐입니다.


흔히들 부부 사이의 문제에 대해 상담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결혼하면서 배우자에게 어떤 기대를 했습니까?'

세부 사항은 서로 다를지라도,
아이러니하게도 대답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이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자신은 자신이 -1부터 +9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자가 -1부터 +9인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상대는 -1부터 +9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망을 하고 상대를 탓하게 됩니다.



이런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기에 앞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으로 예상을 할까요?

자신이 -1부터 +9인 사람이니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아이 역시 -1부터 +9인 아이가 태어날 것으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즉 이들 부모가 그 아이가 -1부터 +9인 아이로 태어날 것을 예상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별다른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콩 심었으니 콩이 나오겠지 하는 것입니다.


이어 이들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부모는 자연스럽게 -1부터 +9를 예상하지만
아이에게서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이보다는 한참이나 못한 모습 뿐입니다.

이 때 부모는 이것을 확인하고 실망을 합니다.

'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그런 기준에 한참이나 못미치는 그런 아이구나'


아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도 부모를 역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이런 부모가 자신에게 '너는 -1부터 +9여야 해' 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로 자기 자신이
신과도 같은 부모가 그래야 마땅하다고 세워준 당연한 기준에
한참이나 떨어지는 그런 놈이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열등감의 뿌리입니다.

나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구나.
결국 나는 부모에게 사랑 받을 수 없는 그런 아이구나...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아이는
이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러한 자신의 모습과는 반대인 허상을 그리게 되고
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월감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열등감과 우월감은 평생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우월감은
실제의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은 자신이 -1부터 +9라고 아무리 생각하고 주장한다 해도,
실제로 자신이 보이는 결과는
그보다는 훨씬 낮은 -5부터 +5일 뿐입니다.

이 갭을 메우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제반 가상의 세계이고
이로 힌해 모든 정신질환과 대부분의 신체질환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5부터 +5인 그런 내가 아니에요.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나는 -1부터 +9인게 나지만(나는 내가 아니지만)
바로 이런 증상이 있기 때문이고, 저런 질병이 있기 때문이예요.

내가 왜 이런 증상이나 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른 선생님이 그러는데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있대요.
그래서 계속해서 약을 먹어야 한대요.

이 증상이나 병만 없으면
나는 계속해서 -1부터 +9를 보일텐데...'



여기까지가 정신분석을 시작한 후
지금으로부터 대략 1년 전까지 보았던 내용입니다.

이와 더불어
애정결핍(사랑확인과정에서의 실패)으로 인해 생긴
엄청난 병적인 동기 두 가지,
즉 집착과 분노가 내 안에 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분별하여 깨닫게 되는 게
이전 상담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상담 환자 중 몇명은
이 내용을 모두 다루어도
끝내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고 또 보는 과정에서
결국 보게 된 것이
바로 1부에서 설명한 가상의 세계와
지금 설명하게될 그림論입니다.


대략 1년 쯤 전에,
이런 내용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위의 설명대로라면
항상 열등감이 먼저 생기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2차적으로 우월감이 생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우월감이라는 허상이 먼저 생길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마음을 스친 것이
바로 그림論입니다.


그림論은 위에 설명한 자신감과 열등감 그리고 우월감의 생성과정을
단지 한 장면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입니다.

먼저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여자이거나 남자일 것입니다.

당신은 과연 언제부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당신이 남자이거나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간단한 내용 같지만,
신기하게도 이 글을 보는 어떤 사람도
이 질문을 스스로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답하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대답을 하고는 합니다.

어려서 목욕탕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서...,
다른 성별의 사람과 자신이
서로 다른 부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등등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내가 남자이거나 또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태어나는 즉시
내 엄마가 '아들이구나', 또는 '딸이구나',

'너는 아들이구나' 또는 '너는 딸이구나'라고 확인하는 순간
그 아이는 자신이 아들이거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엄마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림論의 요체입니다.


열등감의 내용은 바로,
'나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을까요.

위와 같습니다.

그가 태어나는 즉시 그의 엄마가 그를 보고는

'넌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여기고 느낀 순간부터

이 사람은 바로 자신이 그러한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러한 존재'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그림6


그림6에서 보면 한 엄마에게서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갖춘 한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 엄마는 건강한 엄마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사람 스스로가 사랑을 받지 못해,
그래서 생긴 열등감을 평생 가지고 사는 사람이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평생을
우월감으로 위장하고 사는
철저하게 병든 사람일 뿐입니다.

이 엄마에게는 쓸모 있거나 없는,
또는 가치 있거나 없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자신의 병적인 동기와 병적인 생각에 준해
아이를 순간 재단해 버립니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 800년 동안 가장 흔했던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면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 엄마는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딸입니다.

이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아이를 보면서 이럴 것입니다.

'넌 내가 원하는 아이가 아니야. 넌 아무런 쓸모가 없어.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상황이 그림 7입니다.

그림7



이 순간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그대로 감지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에 그려진 그림을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아이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나이가 든 어른 같으면
다른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괜찮게 보거나
또는 안 좋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 입장이지'하고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엄마의 마음에 그려진 모습이
단지 엄마 당신의 입장일 뿐이다 라고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어서 그림8입니다.

그림8



엄마가 아이에게 꼭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해도
그러한 심정이 엄마 마음에 그려지는 순간,

아이는 이를 빛의 속도로 감지하게 되고
순간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화살표 1)


'너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있어서 나를 힘들게만 할 그런 아이구나.
그런 찌그러진 깡통 같은 아이구나.'

즉시로 아이는 자신이 찌그러진 깡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로서는 엄마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자신의 모습이
너무 괴롭습니다.

이런 나를 엄마는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엄마는 나를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습니다.

이 순간부터 아이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런 모습과는 반대인 형상을 그리고는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화살표 2)



엄마 나는 찌그러진 깡통 아니에요.
엄마 나는 꽃이에요.

'엄마, 나는 내가 아니에요.
그러니 엄마, 나를 버리지 마세요.
엄마, 나를 사랑해 주세요.'

이 세 마디가 이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거쳐서 반복하는 모든 것입니다.

또한 몽골이 침입한 이후로 이 땅에서 태어나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생각이 모든 문제를 만들고 이어갑니다.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아이는 '생각'이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립니다.

조건은 한 가지.
자신의 고통을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이후로 이를 깨닫고 '생각이라는 악마'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때까지
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생각이고 악마입니다.

이 생각이라는 악마가 평생 추구하는 것은 '나는 내가 아니예요'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내 인생 자체가 수단입니다.
내 몸과 내 정신 그리고 내 생명도 수단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수단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수단입니다.
내 배우자도 내 아이들도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목적은 단 한 가지.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끝끝내 이루어서
엄마에게 사랑받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행복해지겠다는 것입니다.


3부 치료과정에서 가급적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생각이 바로 악마입니다.

이것은 절대 비유법이 아닙니다.

그만큼 끔찍하고 또 그만큼 엄청난 해를 끼칩니다.
엄청나게 파괴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치료과정 또한 처절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악마'라는 용어는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악마가
나 자신과 상관없는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림論을 통해 그 동안의 의문점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던 것과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열등감이 먼저 생기고 이어서 우월감이 생기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병든 엄마. 즉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생각이자 악마인 엄마는
자신의 동기와 필요에 따라 찌그러진 깡통을 그릴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요즘 대단히 많은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병적인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정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가족계획이 확산된 이후 대부분의 가정은
대개 두 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통계적으로 1남 1녀인 경우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딸에게는 꽃을 그리고 아들에게는 깡통을 그리는 경우가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엄마는 자신이 바로 고추 하나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성장과정 내내 차별받았었고,
결국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남자 형제가 사랑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들의 엄마에게는 사랑이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단지 이들의 엄마가 이들에게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병적인 동기에 따라
아들을 더 좋아했고 딸은 싫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좋아한다는 것의 정의는,
'내 욕구 충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소주와 생선회 또는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털끝만큼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의 정의는
'그를 위해 기꺼이 준비한 마음의 공간'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으로 즉 동사형으로 표현한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마음의 공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것.
그의 어떤 반응에도 늘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의 어떤 것도 다 알고자 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딸인 자신보다 아들인 형제를 엄마가 더 좋아했었던 이 엄마는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해왔습니다.

엄마,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나는 그런 쓸모없는 딸이 아니에요.

하지만 기를 써도 나는 내가 아닌 게 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엄마가 결혼을 해서 1남 1녀를 갖게 되면서
이 엄마의 '생각'은 다시 작동을 시작합니다.

한 편으로 아들을 낳고나서
자신도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아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순간 자위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 엄마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아니면 아들을 낳는 순간부터,
이 아들이 뭔가 모르게 덜 떨어지거나
또는 키우기도 어려운 귀찮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넌 참 키우기 어려운 그런 애구나. 넌 스스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여자인) 내가 항상 챙겨줘야 하는 그런 애구나.

넌 힘들기만 하고 별 볼일 없는 그런 아이구나.

넌 결국 깡통이구나'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만약에 아들에게 꽃을 그린다면
그래서 아들이 예뻐 보이고 대견해 보이고
늠름해 보이고, 성실해 보인다면

이 사실은 다시금 여자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고
결국 푸대접 받았던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여자는 남자보다 못한 그런 존재라는 것을 다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엄마는 아들에게 꽃을 그릴 수 없습니다.


이 엄마는 대신 딸을 보면 왠지 편하고 마음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애가 혼자서도 자신의 할 일을 스스로 잘 하고
매사에 성실하고 또 착합니다.

앞으로 혼자 놔두어도 잘 할 그런 아이인 것 같습니다.

즉, 꽃을 그리게 됩니다.


현재 이 사회에서
바로 이러한 역차별이 끔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림은 그 엄마의 병적인 동기에 따라
그 병적인 동기의 우선순위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그림을 그렸던 간에
그 아이들은 평생을 병든 채로 살게 됩니다.

'엄마 나는 내가 아니에요'
'엄마 나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꽃이에요'


깡통을 그린 경우보다 꽃을 그린 경우가 더 편안하거나 행복할까요.
절대 아닙니다.

꽃을 그린 아이의 경우, 이 아이는 자신이 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되고
자신이 꽃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곧 크게 되면서
현실에서 꽃보다는 훨씬 못한
그래서 깡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는 그야말로 미칩니다.


엄마가 깡통을 그려 자신이 깡통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아이는
평생을 나는 내가 아니예요 하면서 살지만
자신이 깡통이라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습니다.

죽으라고 나를 내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예요 하고 노력하고 기대했던 것이 실패해서
결국 내가 나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을 때
괴롭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밑져야 본전인 것입니다.

즉 나는 내가 아니예요를 기대하면서 평생을 살았지만
실패한다 해도
원래의 나로 되는 것이고
괴롭기는 하지만 밑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꽃을 그린 아이가 크면서
결정적으로 자신이 꽃이 아니라
절대로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꽃보다 훨씬 못 미치는 깡통의 모습을 자신으로부터 보게 되면서
아이는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이럴 경우 같은 문제나 증상이나 질병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정신병이나 심각한 신체질환
그리고 극단적인 자살 같은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모든 정신질환이나 대부분의 신체질환이
바로 그 엄마의 '그림'에서 비롯됩니다.

이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악마일 뿐입니다.



건강한 엄마는 그 어떠한 생각으로부터도 해방된
마음이어야 가능합니다.

'나는 나예요' 하는 사람만이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예요' 하는 사람만이, '너는 너구나'를 할 수 있습니다.


3부 치료과정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나는 나예요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생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고 나라고 하면 되고,
또 너를 보고 너구나 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만이 이 사람은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이 그림 9입니다.

그림9


그 어떠한 병적인 동기도, 생각도 없는 엄마는
늘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 마음은 준비되어 있고,
항상 아이를 마음으로 느낍니다.
이것이 공감(共感)입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아이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선명합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준비되어 있는 마음의 공간에
그대로 비칩니다.

자신의 병적인 동기에 의해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모습이 비어있는 마음의 공간에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넌 그런 아이로구나.'

신기하고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아이 역시 엄마가 '넌 그런 아이로구나'를 마음으로 느끼는 즉시
빛의 속도로 엄마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난 그런 아이로구나'


그런 나를 엄마는 모두 받아줍니다.

내게 어떤 요구도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나로서 신기하고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이후로 평생 동안
나는 내가 아니에요 라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평생을 나는 나예요 하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림論입니다.


대략 1년 전 이런 내용을 보게 된 후로
지난 한 해를 현장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놀라고 또 놀랐고
지금도 계속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질문 하나를 드립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다른 형제에게
각각 어떤 그림을 그린 것 같습니까?

이어서,
당신이나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아이들에게
각각 어떤 그림을 그린 것 같습니까?



3부에서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라고 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미친 사람이
치료되는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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